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哀 悼 歌

피터팬 증후군 x 하또

애도(哀悼)를 잃어버린 아이는 무엇에 울어야 하는가-

第一章

  사쿠라이 쇼라는 남자는 타고나기를 귀하게 타고난 사람이었다.

  개국공신의 후손으로서 대대로 폐하를 섬기는 충신 가문의 아버지는 그 또한 명망 높은 대신이었고 그의 어머니는 제국 제일 가는 상단의 고명딸이자 당시로서는 드물게도 상단의 수뇌부였다. 명예와 재력, 지()와 부()를 양손에 쥐고 태어난 개국공신가()의 적통자. 세상에 태어나자마자 그의 선조들과 마찬가지로 그가 태어난 이 땅, 이 제국을 섬길 운명이 정해진 그의 인생. 언젠가 덕망 높은 자리에 올라 제국의 충신이 되어 존경받는 명예로운 일생을 누리다 눈 감는 그 순간에도 제국의 영화를 바라야 하는 인생.

  사쿠라이 쇼, 그는 일찍이 자신의 위치를 깨달을 수 밖에 없었다. 

  그의 키가 어른의 무릎에도 미치지 못했던 시절부터 그가 받았던 부러움의 시선, 약간의 시기와 질투 그러나 그것을 상회하는 존경심. 그 모든 것들을 자양분 삼아 자라야 할 작은 꼬마 아이였던 그는 자신이 가지고 가야 할 이 운명을 당연한 것이라 여겼다. 마치 봄이 가면 여름이 오고 가을이 가면 겨울이 오는 계절의 변화처럼 아주 당연한 것으로. 명문가의 자제로서 제국의 신하가 되기 위해 그가 갖추어야 하는 언어, 역사, 경제, 지리, 문화, 예술, 무예 등 다방면의 소양들을 자부심 가득한 덕담 그리고 약간의 불안이 담긴 영예로운 압박들과 함께 아주 손쉽게 손에 넣을 수 있는 자신의 인생을 그는 순리로서 받아들였다.

  오히려 아주 가끔은, 이 순리가 편리하다 여기기도 했다.

 

  “나는 그런 거 싫은데.”

 

  그러하였기에 그 순간 느꼈던 작은 불편함이 그를 정해진 운명의 길에서 벗어나게 했던 것일 수도 있다. 그도 아니면, 녹색의 정원 풀밭 위로 강제로 끌어올려져 펄떡이고 있는 잉어를 바라보며 바다에 가고 싶다고 말하던 고요한 얼굴이 매일 밤 꿈에 나타난 탓에 이 편리하고 안정적인 항로에서 영원히 이탈한 것일 수도 있다. 그리하여 타고나기를 가장 존귀하게 태어나 감히 눈을 맞출 수도 없는 자리에 있던 그의 말 한마디를 좇아 기어코 그 존귀한 이를 핏내 가득한 웅덩이로 끌어내리는 오늘에 도착한 것일 수도 있다.

 

  “쇼.”

 

  그대의 작은 얼굴을 내 두 손에 감싸고 나를 부르는 입술 위에 마음껏 응석부려도 무엇 하나 잘못인 일이 없는 오늘을 만들기 위하여.

 

  “나 바다를 보러 가고 싶은데.”

 

  세월이 아무리 지나도 여전히 바다를 보러 가고 싶다 소망하던 그 시간에 멈춘 그대를 품에 안아도 뉘 하나 상관하지 않을 내일을 위하여.

 

  “예. 지금 의복을 내오라 이르지요.”

 

  조그맣게 속삭이며 대답하자 살풋 웃는 얼굴이 고왔다. 검붉은 핏자국이 묻어도 그저 곱기만 한 얼굴을 바라보는 사쿠라이의 입가에 미소가 절로 피었다. 사쿠라이는 웃으며 고운 이의 어깨 위에 무겁게 걸쳐진 의복을 벗겨 바닥에 떨구었다. 핏물 젖은 금빛 비단이 옻칠한 나뭇결에 더러운 핏자국을 남겼으나 사쿠라이는 개의치 않고 품 안의 연인의 목덜미에 고개를 묻었다. 

 

  “사토시.”

 

  매일 낮 매일 밤 그리운 살결 냄새가 여지껏 진동하던 피비린내를 모두 가리었다. 사쿠라이는 더없이 만족스러웠다. 이제 사쿠라이는 어린 날 그를 마주한 때부터 품어온 고민에 마침표를 찍을 수 있었다. 제가 타고난 운명, 제게 주어진 운명, 자신이 걸어야 할 길은 제국의 충신이 아니라, 

 

  “이제 제 곁에만 있으세요.”

 

  만인지상(萬人之上), 이 땅 만물의 아비, 그리고, 

 

  “어명입니다.”

 

  세상 가장 존귀한 그대의 지아비였음을.

第二章

  그날은 흐리지도, 쾌청하지도 않은 날이었다. 온세상이 햇살 아래 아름답게 빛나는 날도, 땅속 씨앗들이 단비를 맞아 초록을 피워낼 준비를 하는 날도, 매서운 바람에 작은 미물마저 잠시 몸을 움츠리는 날도 아닌, 변하는 계절의 작은 틈새, 봄도 아니고 여름도 아니고 가을도 아니고 겨울도 아닌 아무 것도 아닌 날. 사쿠라이는 그저 그런, 아무 것도 아닌 날에 그를 처음 만났다. 

  그래서 사쿠라이는 그날을 오래도록 기억했다. 

 

  “태자 저하. 신() 사쿠라이 인사 올립니다.”

  주위의 성인보다는 한참 작은, 그러나 저보다는 머리 하나 더 큰 어린 사내에게 깊이 허리를 숙이며 인사하는 아버지를 따라 바닥에 닿을 듯이 허리를 접었던 사쿠라이의 눈에 진녹색의 잔디 위를 즈려밟고 있는 홍색과 금색 자수의 당혜가 가장 먼저 들어왔다. 하얀 앞코 부분에 아주 연한 풀물이 들었던 그 당혜는 어째서인지 그날 밤 사쿠라이의 꿈에도 나왔기 때문에 사쿠라이는 그 당혜를 아주 또렷이 기억했다.

  “많이 부족한 아이이나 성심을 다해 태자 저하를 보필할 것입니다.”

  앞에 서 있는 태자 저하를 향한 감사와 존경의 인사가 아버지의 입에서 죽 이어지는 동안에도, 긴 인사를 마치고 아버지가 저를 태자 저하의 곁에 홀로 두고 떠난 이후에도 사쿠라이는 한동안 태자 저하의 당혜 끝만 바라보고 있었다.

  생애 처음 들어온 궁. 담을 이루는 벽돌 하나마저 아주 귀해 보이는 이곳에서 만난 아주 귀한 사람. 앞으로 제가 곁에서 모셔야 할 존귀한 존재. 아버지는 궁에 들어오기 한 달 전부터 저를 붙잡고 궁의 갖은 예절과 지켜야 할 규칙들을 일러주었었다. 특히 황제 폐하의 하나뿐인 아들, 장차 폐하의 뒤를 이으실, 제국의 하나뿐인 태자마마의 말동무로 선출된 영광, 모셔야 할 군주의 곁에서 신의와 충성심을 배우고 훌륭한 재목이 되어야 한다는 긴 설교와 절대 경거망동하여서는 안된다는, 걱정과 미약한 불안이 깃들어있던 긴 훈계를 사쿠라이는 천천히 속으로 곱씹었다. 감히 바로 쳐다보아서도 안되고, 간단한 말조차 허락을 구한 다음 입을 열어야 했으므로 깊이 숙인 허리를 들어올리지 않는 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이름이 무엇이라고?”

  “사쿠라이 쇼라 하옵니다, 태자 저하.”

  드디어 내려진 하문에 사쿠라이는 목을 가다듬고 입을 열었다. 너무 빠르지도, 너무 느리지도 않게 적정한 속도를 유지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사쿠라이 쇼... 제 바로 앞에서 저의 이름을 조그맣게 다시 발음하는 둥근 목소리에 가슴께가 조금 간지러운 것을 꾹 참으면서.

  “음.. 그럼, 쇼군.”

  아무렇지 않게 친근한 듯 부르는 이름에 어깨가 펄쩍 튀었으나, 고개를 들어올리는 무례는 가까스로 참아내고 긴장으로 막힌 목을 풀기 위해 침을 꿀꺽 삼켰다. 숨을 크게 들이쉬고 태자의 부름에 답하려는 순간 고개 아래로 가지런한 손가락이 불쑥 들어왔다. 예상하지 못한 사건에 사쿠라이는 대답을 해야 한다는 것도 잊고 찰나에 숨이 멈췄다.

 

  “얼굴을 보고 싶은데.”

 

  그렇게 말하며, 사쿠라이의 대답과 의지는 무시한 채, 아주 당연한 듯 긴 손가락이 사쿠라이의 턱끝을 간질이며 그의 얼굴을 들어올렸다.

 

  “곱구나.”

 

  단 세 음절이었다. 느릿하고 둥근 세 음절. 그 세 음절에 언젠가 어머니를 따라갔던 상단길에서 마주한 바다가 떠올랐다. 귀를 울리는 커다란 소리에 뒤이어 햇빛 아래서 부서지던 포말의 반짝임. 하얗고 말간 얼굴. 물방울을 닮은 눈동자와 둥근 물방울이 타고 흘러갈 듯한 콧날. 연분홍의 얇은 입술. 좋은 향이 나는 것 같은, 말끔히 정돈된 머리칼. 곱다니. 사쿠라이는 생각했다. 그 말은 제 앞에 있는 이 고운 이를 위해 빚어진 단어임이 분명하다고. 그리고 그는 깨달았다. 여전히 숨을 멈춘 채 눈앞의 이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던 그 순간 사쿠라이는 깨달았다. 

  저는 분명, 이 고운 이를 위해 살겠구나. 일생 그의 곁에서, 

  그를 위해. 

第三章

第四章

  “쇼군이 할래, 태자비.”

 

  이제는 고개를 들면 그를 내려다볼 수 있을 만큼 자랐을 때였다. 그럼에도, 그만큼의 시간이 흘렀음에도, 사쿠라이는 간혹 오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할 때가 있었다. 

 

  “오늘 예법 수업이 끝나면, 정원으로 답청(踏靑) 나가실런지요.”

 

  그러나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지는 못하여도 어떤 의미인지는 눈치챌 만큼의 시간은 흘렀던 때였다. 말갛게 올려다보는 눈동자를 보며 오노의 뜬금없는 소리에 익숙하다는 듯 사쿠라이는 미소지었다. 

  그 다정한 목소리와 다정한 얼굴을 빤히 보던 오노가 어쩔 수 없단 듯 한숨을 폭 쉬었다. 지긋지긋해. 찌푸리는 미간이 잔뜩 골이 난 심정을 대변하고 있음에도 사쿠라이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어차피 매번 똑같은 소리인 것을.”

 

  그대의 아비는 재주도 좋아. 어떻게 똑같은 소리를 매번 다른 단어로 그리 용하게 바꾸어. 제 아비를 향한 불평과 질책에도 사쿠라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송구하옵니다. 그리 재주 좋은 아비의 자식이라. 무릎을 꿇어 그의 시선 아래로 몸을 낮춘 사쿠라이가 조심히 오노의 손등 위로 제 손을 포개었다.

  근래 제 아버지가 황태자를 향해 무엇을 청하는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예법 수업을 빙자하여 태자비 간택에 대해 끊임없이 긴 상서를 올렸을 제 아비의 모습이 눈에 선해 사쿠라이는 그의 불평에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었다. 

  황제 폐하의 단 하나뿐인 아들. 제국의 통치자의 적통. 언젠가 세상 만물의 아비가 될 유일무이한 존재. 오노 사토시는 타고나기를 귀하게 타고난 사람이었다. 모든 것의 주인이 될 운명. 모든 것을 손에 쥐고 태어난 자. 그러나 동시에 자신의 모든 것을 세상 만물에 바쳐야 할 자. 그렇기에 정작 자신만의 것은 무엇 하나 가질 수 없는 사람. 아비도, 어미도, 친우도, 정인(情人)도 모두 세상에 바쳐야 할 사람.

  사쿠라이는 오노 사토시의 운명을 알았다.

  그리고 꽤나 자주, 그 운명이 참을 수 없이 증오스러웠다.

 

  “나는 그런 거 싫은데.”

  그렇기에 그런 거 싫다 투정하는 목소리를 들을 때마다 심장 깊은 구석에서 무언가가 금이 가는 소리가 들렸던 것일 터다. 기이한 행동조차 기품이 있는, 왕이 될 재목. 조용하나 이목을 끌고, 유순하나 좌중을 압도하는, 만인지상(萬人之上)에 오를만한 품격이 있는 자. 그가 세상의 주인이 될 자로서 충분한 자격이 있음을 믿어 의심치 않음에도, 그런 거 싫다 하는 그의 투정에 의문해 본 적 없던 앞날이 잘게 부서지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던 것은 순전히 제 덧없는 욕심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의 바른 운명을 위해선 제 욕심 숨겨야 한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참지 못했던 것은 고운 그이를 향한 제 욕심이 너무 커졌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쇼군, 네가 할래?”

  그래서 어찌 그런 망측한 말씀을 하시냐며 호들갑을 떨어야 하는 순간에도,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대꾸하였던 것일 거다.

 

  “제가 그리 하면 저하께선 제게 상으로 무엇을 주시겠습니까.”

 

  진실로 무엇을 바라고 했던 대답은 아니었다. 자신이 바라는 것은 너무 명확했으니까. 귀한 것들만 모인 구중궁궐, 그 안에서 내게는 가장 귀했던 당신. 바다 끝 하나 보이지 않는 이곳에서 부서지는 파도의 방울을 닮은 당신. 감히 함부로 입에 올릴 수도 없는 당신의 이름을 부를 수 있는 밤이 허락되었던 순간, 당신의 손을 잡고 입을 맞추는 것이 허락되었던 순간, 당신의 입술 위에서 숨을 나누어도, 당신의 눈꺼풀 위에 자리한 작은 점 위에 입을 맞춰도 웃어주는 당신을 눈에 담았던 순간, 따뜻한 당신을 품에 안고 잠에 청하는 것이 허락되었던 그 순간. 그 순간들이 켜켜이 쌓여 욕심이 끝없이 깊어졌던 내가 바랐던 것은 단 하나였으니까. 아마 아주 오래전부터 변하지 않았을 소원. 당신의 당혜 끄트머리를 물들인 연한 풀물을 뚫어져라 쳐다봤던 그 순간부터 변함이 없던 그 소망. 그런 내게 당신이 줄 수 있는 건-

第五章

  예호(叡湖)년 3년. 흐리지도, 쾌청하지도 않은 날이었다. 새로운 황제가 즉위한 이래 큰 가뭄도 큰 풍년도 없는 날들이 지속되던, 큰 이변도 큰 기적도 없는 날들이 계속되던 날이었다. 그런 날에 사쿠라이는 변한 것과 변하지 않은 것을 깊이 고민했다.

 

  “쇼군, 네가 할래?”

  그리고 그는 변해버린 것과 변하지 않을 것을 깊이 고민했다.

  열 손가락으론 채 다 셀 수 없을 만큼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변한 것이라 하면 황태자였던 당신은 황제가 되었고 그의 애동이었던 자신은 황제의 재무대신이 되었다는 것. 

 

  “제가 그리 하면 저하께선 제게 상으로 무엇을 주시겠습니까.”

 

  변하지 않은 것이라 하면 당신은 여전히 바다에 가고 싶다 명하고 나는 여전히 그런 당신의 손을 잡고 싶다는 것.

 

  “글쎄... 뭐가 좋을까.”

 

  변하지 않을 것이라 하면 당신은 여전히 그런 것 싫어할 테고, 여전히 잉어가 자라는 것을 탐탁치 않아 할 테고, 그래서 자신은 매해 여름 당신의 정원에 어린 잉어들을 풀어야 한다는 것. 매해 당신의 가늘고 긴 손가락 마디마디에 붉은 물이 들고 비릿한 냄새가 들러붙는 것을 바라봐야 한다는 것. 

  “쇼군은 무엇이 갖고 싶어?”

 

  사쿠라이는 마지막으로 변하지 않아야 할 것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앞으로도 당신이 바다에 가고 싶다 청()같은 명()을 내려야 할 사람은 자신이어야 했다. 파도가 부서지는 듯한 미소를 지어주는 것도 자신이어야 했고, 이름을 부르는 것이 허락되는 것도, 숨결을 나누는 것이 허락되는 것도, 긴 밤 품을 내어주는 것이 허락되는 것도 모두 자신이어야 했다.

  그것만이 영원히 변하지 않아야 했다.

 

  “변하지 않는 당신을 원해요.”

  그리하여 나는 당신이 당신을 잃어버릴 권리를 가졌다. 당신의 모든 시절에 애도(哀悼)할 수 있는 권리를 가졌다. 당신의 운명에, 나의 운명에 안녕을 고할 수 있는 권리를 가졌다.


 

  그날은 예호(叡湖)년 3년의 어느 날이었다. 변하는 계절의 작은 틈새, 봄도 아니고 여름도 아니고 가을도 아니고 겨울도 아닌 아무 것도 아닌 날. 그날, 개국공신가의 적통이자 황제의 총애를 받던 재무대신 사쿠라이 쇼는 역모를 꾀하였다. 

  그의 일생 가장 소중한 정인(情人)을 위해.

  “이제 제 곁에만 있으세요.”

  그는 제 고운 정인(情人)이자 제국의 주인 황제 오노 사토시를 폐위하였다.

  태자 저하의 시중을 들며 말동무가 된 이후 처음 맞는 여름, 사쿠라이는 미지근한 물로 만든 옷을 입고 있는 것 마냥 눅눅하기만 했던 우기(雨期) 내도록 태자의 곁에 있었다. 그가 바라보는 것을 함께 바라보고 그가 듣는 것을 함께 듣고 그의 침묵도 그의 시선도 모두 받아내는 시간을 보냈다.

  모든 것이 눅눅한 나날이었다.

  태자 저하의 일과는 간단하면서도 다망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제국의 황태자였고, 언젠가 황제가 될 분이었으니까. 동시에 그는 조금은 이상한 사람이었다. 모처럼 어여쁜 눈이니 절대 고개를 숙이지 말라 명하거나 모처럼 근사한 목소리니 자신을 이름으로 불러보라 명하거나. 전부 아버지가 수없이 금했던 행동들이었다. 그런 금지된 행동을 거침없이 명하는, 저보다 머리 하나는 크지만 그를 둘러싼 수많은 성인들에는 한참 못 미치는 어린 제 주군을 사쿠라이는 부지런히 좇을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사쿠라이에게 주어진 일이었으므로. 그의 뒤에서 고개를 조아린 채 비에 젖어 진탕이 된 흙바닥을 바라보며 기다리는 일. 이 아름다운 이가 어서 저를 불러주기를 기다리는 일이 자신이 해야할 일이었으므로. 

 

  “쇼군.”

 

  기다리던 나지막한 부름에 지체 없이 그의 곁에 가 서면, 그는 부른 적이 없다는 것 마냥 굴었다. 혹은 그저 곁에 있기만 하면 된다는 듯 굴었다. 그도 아니면 말하지 않은 속내를 맞춰보라는 듯 굴었다.

  그래도 사쿠라이는 그런 그가 번거롭지 않았다. 오히려, 태자가 점점 곁을 내어주는 것에 이상한 만족감을 얻었다. 충만히 차오르는 만족감에 저도 모르게 미소짓는 날이면, 어쩌면 진실로 이상한 사람은 태자 저하가 아니라 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사방이 온통 눅눅하고 질척거려도 그가 저를 부르는 순간, 그는 황태자이고 자신은 한낱 애동일 뿐이라는 자각이 사라지는 기이함이 드는 것이 등골이 오싹할 정도로 기분이 좋았으니까.

 

  그래서 그날, 사쿠라이는 처음으로 겁도 없이, 먼저 태자 저하를 불렀다. 내내 비가 퍼붓다 아주 간만에 해가 하늘 높이 떠올랐던 날. 장맛비가 영 그치질 않는 통에 가벼운 산보 하나 하지 못해 지루함을 숨기지 못하는 태자 옆에서 괜히 안절부절못하던 차에 희뿌연 대기 사이로 밝게 동이 튼 날. 

 

  “태자 저하. 오늘은 날이 좋습니다. 잠시 거니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태자 저하가 좋아하는 잉어를 보러 가자고, 저하가 즐겨 걸으시는 산책길 걸으며 신선한 바람을 쐬는 것이 어떠냐 말을 꺼냈던 그날은 사쿠라이가 아이다운 순진한 즐거움을 숨기는 것에 약간 실패한 날이기도 했다. 그랬기 때문에 이제 막 아침이 밝았을 뿐인데 묘하게 젖은 검은 머리칼과 진흙 묻은 당혜를 눈치채지 못했으리라. 그리고 돌아보건대, 그 어린아이다운 실패 덕분에 그의 어린 주군이 제 손을 잡아 이끈 것이리라.

 

  “그래.”

  짧은 긍정과 함께 밝게 움트는 해보다 더 환한 웃음을 지어준 것은 간만에 나가는 산보 탓이 아니라, 제게 보여줄 풍경이 기대되어 지은 것이라는 것을 사쿠라이는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 깨달았다.

  비가 퍼부어 넘쳐버린 연못. 흠뻑 젖어 파헤쳐진 진흙탕에 뒹굴고 있는 잔디. 흙과 풀이 뒤집혀 한 걸음도 가까이 다가가기 싫은 엉망진창인 땅 위에 쓰레기처럼 널린 비릿한 물체. 사쿠라이는 저도 모르게 소매로 코를 막고 엉망이 된 연못가를 바라봤다. 한때는 투명한 수면 아래에서 붉은 지느러미를 반짝이며 휘날렸을 생명들을.

 

“내가 죽였어.”

 

  눈앞의 처참한 광경과는 판이한, 부드럽고 맑은 목소리가 사태의 진실을 고백했음에도 눈앞의 광경과 귓가에 들리는 나긋한 말을 쉽게 나란히 두기 힘들었다. 그렇기에 사쿠라이는 제 표정을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순간 말을 잃어버린 제 표정이 궁금했는지 고개를 숙여 저를 살피는 맑은 눈망울의 의미도 읽어낼 여력이 없었다. 그럼에도 어째서 그 순간마저 제 눈앞의 이는 그리 고운 건지. 시야에 들어찬 그 말간 얼굴이 빛을 잃은 붉은 비늘과는 달리 반짝이고 고와, 사쿠라이는 색을 잃은 생명의 비릿한 내음과 그 고운 음색의 차가운 고백을 나란히 두는 것이 조금 어려우면서도, 아무 일도 아닌 마냥 물었을 것이다. 어린아이같은 순진한 호기심으로. 

 

  “왜요?”

  “더 자라면 안되거든.”

  사쿠라이의 혼란은 모르겠단 듯 당연한 진리를 말하는 양 쉬이 대답하는 태자의 옆얼굴을 보며 사쿠라이는 궁에 들어오기 전 들었던 소문에 대해 생각했다. 제가 궁에 들어오기 전, 태자비 간택이 한창이었던 그 해에 궁궐 담을 타고 넘어왔던 그 소문에 대해. 어느 것 하나 부족함이 없는 태자비 후보들 가운데 최종 간택이 이루어지기 전 태자궁 정원에 있는 작은 연못이 빨간 물로 채워졌었다는, 한여름 괴담같은 소문에 대해. 원인을 알 수 없는 해괴한 일이 연일 일어나 결국 태자비 간택이 철회된 일에 대해.

  그때도 당신은 눈물 하나 흘리지 않고 죽어가는 비늘들을 바라봤나요. 사쿠라이는 순간 그리 묻고 싶었다. 그때에도 그리 고운 미소를 지으며, 옷자락에 핏물과 비린내 진득하게 달라붙는 것 따위 신경쓰지 않고, 말간 얼굴로 환히 웃었는지. 웃었다면, 누구에게 웃어 보였는지.

 

  “바다에 가고 싶어, 쇼군.”

  죽어버린 잉어들 앞에서 울지 않는 그. 강제로 숨을 빼앗긴 잉어 앞에서 바다에 가고 싶다 말하는 그. 사쿠라이는 그런 그에 대해서만 생각하기로 했다. 잉어가 자라면 안된다 하는 태자 저하. 사라지는 작은 순간들을 잃어버릴 줄 모르는 태자 저하. 잃어버릴 줄 모르기에 애도할 줄 모르는 태자 저하. 

  그래서 특별한 태자 저하.

  사쿠라이는 시간이 지날수록 눈앞의 고운 이가 특별해질 것을 어렴풋이 예감했다. 영원히 자라지 않는 아이. 누구나 잃어버리는 것들을 홀로 간직할 사람. 

 

  사쿠라이는 제 고운 태자 저하를 바라봤다. 부드럽고 말간 얼굴이 저를 보며 웃고 있었다. 그래서 사쿠라이는 앞으로 계속 그에 대해 생각하기로 했다. 연못을 넘어 흙바닥까지 더럽혔을 비릿한 피내음 속에서도 분명 아름다웠을 그에 대해서. 

  반짝이는 비늘보다, 부서지는 포말보다 눈부셨을 그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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