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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게 피운 이 아름답다

​피스틸 버스 x 듀비

“사토시, 우리 이제 계속 함께하자.”

 

나는 눈을 감으며 달콤했던 그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그리고 나는 그가 아닌 다른 사람의 꽃을 피웠다.

 

 

-투구꽃의 꽃말 : 밤의 열림-

 

 

“그래서 언제 갚을꺼지?”

“일주일만 시간을 주시면…”

“내가 너 같은 거짓말쟁이를 어떻게 믿고?”

“이자 한 번도 밀린 적 없잖아요… “

“그거야 네가 믿을만한 사람일 때 얘기고”

“일하는 곳도 사는 곳도 전부 알잖아요.. 어디 도망 안 가니까..”

“도망이 문제가 아냐, 네가 케일릭 인 척하고 사는 게 문제지. 피스틸 주제에.”

“어…어떻게…”

“냄새나는 시장에서 일한다고 그 향이 가려질 거라고 생각했나 봐?”

“야마시타씨 제발 한번만요…”

“아, 뭐 이렇게 불쌍하게 굴면 어쩔 수 없나? 그럼 이렇게 하는 건 어때? 오노 씨”

“뭐…뭔데요..”

“일주일이 되어도 돈을 못 갚는다, 그럼 대신 내가 원하는 대로 하는 거야. 단 하룻밤만. 그럼 지금 갚을 수 있는 것만 내고 나머지는 받은 거로 해서 깔끔하게 빚 탕감해줄 테니까.”

“하루..요?”

“어차피 갚아도 그만 안 갚아도 그만 아니야?”

“그…. 그렇지만…”

“자비를 베풀어도 싫다고 하면 어쩔 수 없고. 대신 신체 포기각서 이런 거 쓰라고 안 할 테니까”

“그래, 내가 오노 씨를 뭐하러 다치게 하겠어. 지금도 돈 갚으란 소리를 얼마나 젠틀하게 하고 있어 내가.”

“알겠어요. 대신 꼭 약속 지키셔야 해요.”

 

나는 그날을 두고두고 후회했다.

협박하는 야마시타의 제안을 받아줄 게 아니라 어떻게든 도망쳤어야 했다고.

 

 

--

 

 

“역시 좀 부족하네 오노 씨. 조금이 아니라 사실상 절반이지만. 채무 면제서류야. 읽어보고 싸인해.”

“말을 바꾼다거나 그런 거 없는 거죠?”

“그랬으면 내가 서류까지 만들어서 주겠어? 귀찮게.”

“알겠어요. 싸인할게요.”

“뭐 더 하고 싶다거나 조건을 바꾸고 싶다면 말해 고쳐줄 테니까.”

나는 대답 대신 고개를 가로저었다.

“역시 귀엽다니까? 마음에 들어.”

 

나는 야마시타가 써준 채무면제서류에 사인을 했고 야마시타는 만족한 듯 와인을 따르며 웃고 있었다.

사인을 마치자 야마시타도 서류에 자신의 사인을 새겨넣었다.

“이젠 정말 깔끔하게 정리됐어. 서류는.”

“줘요.”

서류를 받으러 손을 뻗자, 야마시타는 대신 와인잔을 건넸다.

“약속한 것부터 받아야지.”

 

 

와인잔을 단숨에 비우고, 눈을 질끈 감았다.

나는 그렇게 나의 나무에 첫 번째 꽃을 피웠고, 그다음 날 짐을 싸 가장 먼 바닷가로 도망쳤다.

 

 

--

 

 

“사토시 안녕?”

“아 사장님 안녕하세요.”

“그냥 편하게 제이라고 부르라니까 나도 사토시 이름 부르는걸.”

“아…”

“물론 사토시가 이름밖에 안 알려줬지만.”

“죄송해요. 제이.”

“괜찮아. 오늘 아침에 손님은 별로 없었지?”

“바쁘진 않았어요.”

“그럼 들어가서 좀 쉬어요. 지금 손님 몰리는 시간 아니니까 이 시간에 좀 쉬어야지.”

“빵 발효만 좀 보고…”

“아아 사장님 명령이니까 좀 들어!”

제이가 웃으며 나를 재촉했다.

 

발길 닿는 대로 도망쳐 나와 어디인지도 모르는 채로 가게 앞에서 떨고 있던 나를

‘스프라도 드실래요?’ 하고 가게 문을 열어주더니 이내 갈 곳이 없으면 당분간 지내라고 들여보내 준 좋은 사람이었다.

어느덧 3개월이지나 나는 제이의 가게에서 빵을 배우며 잊었던 따스한 삶을 배워가고 있었다.

 

“저기 사토시.”

“네?”

“일 끝나면 많이 피곤해요?”

“아, 이젠 적응해서 그렇게 많이 힘들지는 않아요.”

“그러면 혹시 나랑 영화보러 안갈래?”

“네?”

“보고싶은 영화가있는데 혼자가기는 좀 그래서.”

“네 같이가요.”

 

 

나의 대답에 제이는 웃었고, 저녁시간이 한참 지난 밤에 우리는 가게문을 닫고 동네의 영화관으로 향했다.

 

 

“제이 로맨스 영화 좋아하나 봐요.”

“아, 사토시는 싫었어요. 혹시?”

“재밌던데요?”

“다행이다.”

“직원이랑 사장이랑 보는 건 좀 웃기긴 하지만.”

“그럼 직원이랑 사장 빼고 사람이랑 사람 사이였으면?”

“음 그럼 데이트 같았겠죠?”

“데이트였다고 하면, 사토시가 불편할까요?”

“네?”

“싫으면 싫다고 해도 괜찮아요.”

“그..럼 그 말은..?”

“나랑 만나보는 거 어때요. 사토시? 불편하면 선 넘지 않을 테니까 사토시가 편한 대로 해도 괜찮아.”

“아.. 제이 저는…”

“사토시가 말 못 할 사정이 있다는 거 그거 대략 눈치로 알아요. 어디서 왔는지 어떤 삶을 살았는지보다 어쨌든 저는 지금 사토시가 좋아요. 빵을 만들 때 자기도 모르게 밀가루를 코에 묻히고, 손님이 오면 누구보다 상냥하게 웃어주는 사토시가요.”

“제이…”

“대답 지금 안 해도 괜찮아요. 당장 좋아해 달라는 거 아니니까.. 그냥 좋아한다는 거 그거 말하고 싶어서. 아 물론 내가 사토시를 도운 거 그건 좋아해서 그런 거 아니에요 아니 그러니까 아 왜 이렇게 횡설수설하게 되지.”

 

당황하며 쩔쩔매는 제이가 웃기면서 귀엽다고 생각했다.

 

 

“바로는 대답 못하겠지만, 나쁘진 않을거같네요 제이.”

“저..정말?”

“대신 좀 천천히 생각해볼게요.”

“좋아요. 사토시가 하고싶은대로.”

 

 

-보라색 락스퍼 꽃말 : 젊은 날의 추억-

 

 

일주일쯤 지나 우리는 자연스럽게 몇 번의 데이트를 했고, 또 자연스럽게 사귀게 되었다.

그리고 제이가 사귀자고 고백한 날 나는 제이에게 오노 사토시라는 이름과 살아온 삶에 대해서 털어놓게 되었다.

 

“그럼, 처음 피스틸 이라는 거 알게 되었을 때 그땐 아무도 곁에 없었던 거야?”

“응. 아버지가 남긴 때문에 다른 가족들 다 생사 확인 못하고 살았거든.”

“고생 많았구나 우리 사토시, 이리와 내가 안아줄게.”

“고마워.”

“그럼 지금은 괜찮은 거야 빚..?”

“응. 다 해결해서 다만, 혹시나 또다시 얽히고 싶지 않아서 그래서 도망쳤어.”

“잘했어. 여기서 다시 시작하면 돼. 무슨 일 있으면 내가 다 나서서 해결해줄게.”

“든든하다. 진짜로.”

“그래서 말이야 줄게 있어 사토시.”

“뭔데?”

“생일은 내가 몰라서, 사토시 생각나는 사파이어 목걸이야.”

“제이!”

“행운을 상징한대. 내가 당신 만난 것처럼.”

제이는 목걸이를 내게 걸어줬다.

“나는 줄 게 없어..”

“사토시, 난 사토시만 있으면 괜찮아.”

“제이…”

“사토시, 우리 이제 계속 함께하자.”

 

나는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제이는 내게 입을 맞춰왔다.

그리고 그날 밤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하게 보라색 락스퍼꽃이 피어났고

 

다음날 내가 눈을 떠서 본건 비열한 웃음을 띤 야마시타와 생기를 잃은 제이의 모습이었다.

제이를 흔들어 깨워도 미동 없이 차갑게 잠들어있을 뿐이었다.

 

“오노 씨 오랜만이야? 근데 내가 말 안 했던가? 나 베놈 스테먼이라고.”

“다…당신!”

“아 당연히 알고 있을 줄 알았는데 몰랐나 봐 내가 말 안 했나?”

“마..말도안돼”

“세상엔 참 말도 안 되는 일투성이지? 오노 씨 때문에 멀쩡한 사람만 죽고 말이야.”

“당신 때문에!!! 아니 나..나 때문에 제이가….”

“그래 오노 씨 때문이지. 오노 씨는 이제 살인자네?”

“내가…내가…제이를…”

“오노 씨? 정신 차려. 상황은 정리해야 할 거 아니야.”

“나 때문이야…나 때문에…”

“오노 씨, 내가 정리해줄 테니까 돌아가는 거야 어때?”

“나는…나…나는…”

 

나의 부족함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다.

애초에 행복함이라는 감정을 욕심내서는 안되는거였다.

따뜻한 사람이 처음으로 나에게 준 행복을 받을 자격도 없었던 내가 너무 덜컥 받아버렸기 때문에 그래서 그렇게 행복도 사랑도 너무 쉽게 잃어버린 나는 그렇게 스스로 지옥으로 걸어들어갔다.

 

 

--

 

 

그 이후로 3년이라는 시간이 지나, 내 등에는 많은 꽃이 새겨졌다.

역겹게도 나는 너무도 죽이고 싶은 야마시타의 사업이 날로 번창하게 돕는 도구가 되었다.

그리고 때로는 야마시타의 유희가 되어야 했다..

어느새 내 꽃들은 등을 넘어 팔과 다리를 뒤덮어 이젠 긴 팔과 긴바지를 입어야만 많은 꽃송이를 숨길 수 있었다.

 

야마시타의 명령으로 다른 꽃송이를 새기고 나서 매무새를 다듬고 정리를 하고 있자 야마시타가 부하와 함께 방으로 찾아왔다.

 

“오늘도 고생했어. 사토시”

“내 이름 부르지 마.”

“아아 예 알겠습니다. 오노 씨. 대우해드려야죠, 내 소중한 보물.”

야마시타가 기분 나쁜 웃음을 흘리며 손을 뻗어 셔츠 소매 깃을 잡았다.

“뭐 하자는 거야.”

“꽃이 어디까지 피어있나 봐야지.”

“당신이 무슨 상관인데”

“당신이라고 불러주니까 좋은데? 오노 씨. 내가 나무 주인인데 주인이 나무를 돌보는 건 당연하잖아?”

“알 거 없어.”

“잊었나 본데. 오노 씨 나무는 그냥 아낌없이 주인한테 주기만 하면 되는 거야 쓸모없는 반항이 아니라.”

 

야마시타의 비웃음 소리와 함께 주먹세례가 쏟아졌고 거칠게 셔츠 단추가 뜯겨나갔다.

 

 

“꼭 말로 하면 안 듣더라 오노 씨는? 피스틸 주제에 이만큼 거둬주고 먹여줬으면 나한테 고마워해야지 안 그래? 내가 내미는 손이 아니었으면 당신은 살인자로 평생 차가운 감옥에서 썩었을 거라고 내가 몇 번 말해. 그냥 내 옆에서 가만히 나무처럼 옆에 있으면 좋잖아?”

나는 고개를 돌려 터진 입안에서 비릿한 피를 뱉어냈다.

 

 

“꽃이 많이 폈네. 당분간 좀 쉬고 있어. 다시 시작해야지 처음부터.”

 

나는 대꾸 없이 단추를 주워 방을 나섰다.

꽃이 더 이상 피울 자리가 없으면 피스틸의 생명은 끝이 난다는데 그렇게 끝을 바랬는데도 그것 또한 욕심인가 싶었다. 또다시 시작하는 지옥이라니.

 

 

-벚꽃의 꽃말 : 삶의 아름다움과 덧없음-

 

 

아침부터 끌려 나오니 야마시타가 운전석에 내려 얼른 타라며 조수석 문을 열었다.

 

 

“오노 씨, 오랜만에 외출이지? 여름인데 안 덥나? 긴 팔 긴바지?”

“신경 쓰지 마.”

“뭐 오늘만 지나면 다시 반팔 반 바지 입을 수 있을 거야.”

야마시타가 차 문을 닫으며 시동을 걸었다.

“관심없어.”

“찾았거든 안티스테먼. 비싼 돈 주고 찾았으니까 오노 씨가 날 실망하게 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나는 말없이 차창 밖을 내다봤다.

뜨거운 햇살의 아지랑이가 여름임을 알려주는 듯했으나

이내 까만 먹구름이 몰려와 금방이라도 비를 뿌릴 것처럼 하늘이 어두워졌다.

 

“끝나면 데리러 올 테니까.”

야마시타는 담배를 물고 올라가라고 손짓했다.

허름한곳일거라고 생각했으나 꽤 깨끗한 호텔이었다.

 

“오노 사토시님인가요?”

“아, 네.”

“위쪽으로 올라가시죠. 기다리고 계십니다.”

 

지배인으로 보이는 남자가 객실의 문을 열었고, 그곳엔 말끔하게 생긴 다른 남자가 창가에 기대 내가 들어온 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나는 대답대신 주변을 살폈다.

“사쿠라이 쇼입니다.”

“통성명까지 해야하나요?”

“뭐 불편하시다면 안하셔도 상관없습니다.”

“네.”

 

나는 침대가 아닌 소파 위로 털썩 앉았다.

어딘가 여유로워 보이는 사쿠라이라는 사람은 그런 나를 흥미로운 듯 지켜보고 있었다.

 

“돈 받았다면서요?”

“아, 네.”

“그러고 싶나?”

“하고 싶어서 온 게 아닌가 보네요.”

“상관있어요?”

“궁금해서요.”

“신경끄시지?”

“그럴게요.”

“고분고분하네? 벌써 돈 받은 건가?”

“아뇨 아직. 마지막에 주기로 했거든요.”

“그럼 하려고 들어야 하는 거 아닌가”

“당신이 하고 싶지 않으면 할 생각 없어요.”

“웃기시네.”

“원래 그게 당연한 거니까요.”

“당신이 돈 받아야 할 사람은 당연한 게 안 통하는 놈이니까.”

“그런 사람인 거 같긴 하더라고요.”

“태평하네?”

“그런 그쪽도요.”

“난 뭐 당장 죽어도 아쉬울 게 없으니까.”

“…왜요?”

“알 거 없어.”

 

일부러 차갑게 뱉은 대답에도 흥미롭다는 듯 나를 쳐다보는 눈길이 버거워 일부러 고개를 돌려 잡지 하나를 집었다.

“왜 자꾸 봐.”

“신기해서요. 보통 저한테 찾아오는 사람은 두 가지 부류거든요. 첫번째는 자기가 살고 싶어서 오거나 두 번째는 남이 살리고 싶어서 오거나.”

“근데.”

“그런데 그쪽은 전자도 아니고 후자랑 가까운 거 같은데 또 아닌 거 같고.”

“원래 그렇게 남 일에 관심이 많아요? 경험이 많은가 봐?”

“없진 않죠. 보통 그래도 나랑 하고 나면 다들 웃고는 나가는데.”

“재수 없네.”

“그런가요. 하긴 뭐 돈 때문에 이렇게 사는 것처럼 보이니까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네요.”

“아니라는 거야?”

“저는 없어도 그만이거든요. 그냥 사람 살리려고 이러는 거니까.”

“나 같은 거 살릴 필요 없어.”

“그러기엔 그쪽, 웃는 모습도 궁금하고 그래서 살리고 싶어지는데요?”

“억지로 할 마음 없다며?”

“맞아요. 그래서 기다릴 생각이에요.”

“마음대로 해. 평생 기다릴 테니까.”

 

보고 있는 잡지 너머로 느껴지는 시선을 계속 피하며 나는 보는 둥 마는 둥 했던 잡지를 내려놓고 소파에 등을 기댔다.

 

“뱉은 말은 지키니까 안심하고 침대 가서 누워요. 피곤하면.”

“뭘 믿고?”

“강제로 할 생각이었다면 애초에 당신이 소파에 앉아있을 수도 없었겠죠.”

 

납득이 가는 대답이었기 때문에 소파에서 일어나 침대에 가서 앉았다.

앉아있는 나를 보더니 흥미로운 얼굴에서 의문스러운 얼굴로 사쿠라이의 얼굴이 바뀌었다.

 

 

“왜요?”

“피곤한 건 아니라서.”

“그래요. 그럼.”

“그쪽은 왜 앉아?”

“소파는 불편해서요.”

“뭐 그럼 그러던지.”

 

한참 그렇게 멍하니 앉아있다 어느새 잠이 들었는지

어둑해진 주변과 제 옆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는 사쿠라이가 보였다.

늘 제멋대로 구는 사람과 있다 보니 이게 정상인데도 정상 같지가 않아서 그게 제법 웃겼다.

 

“어이, 그럴 거면 편하게 눕지?”

“그쪽도 안 누웠는데요.”

“거참, 나랑 무슨 상관이냐니까?”

“그쪽이 편하게 누워야 제가 눕죠.”

“알겠으니까 그쪽도 누워서 자든지 말든지.”

 

내가 등 돌려 눕자, 사쿠라이도 눕는 소리가 났다.

“근데 그쪽 이름 진짜 알려줄 생각 없어요?”

“어.”

“왜요?”

“곧 죽을 사람 이름 알아서 뭐 하게.”

“안 죽어요 당신.”

“그 쪽한테 돈 주는 사람한테 맞아 죽든 어쩌든 오늘 당신이랑 안 해도 난 죽을 거야.”

“그 사람이 당신 때려요..?”

“알 거 없어. 잠이나 자.”

“계속 여기서 지내면, 아니 내 옆에 있으면. 그 사람 곁에 있을 필요 없어요.”

“관심 없어.”

“그 사람한테서 벗어나면 당신, 당신 인생 새롭게 살 수 있어요.”

 

나는 대꾸 없이 눈을 꼭 감은 채로 잠을 청했다.

 

 

--

 

 

음식 냄새에 눈을 뜨니, 사쿠라이가 룸서비스를 시켰는지 테이블에 음식이 가득했다.

“깼어요?”

“이게 다 뭐야?”

“뭘 좋아하는지 몰라서 그냥 제가 좋아하는 거랑 이것저것 시켰어요.”

“이걸 다 먹게?”

“당신이랑 제가 먹는 거죠.”

“너나 먹어.”

“당신도 먹어요, 너무 마른 거 같은데.”

사쿠라이나 먹으라며 다시 침대에 눕자, 덜그럭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사쿠라이가 조심스럽게 시트를 걷어내며 이거라도 먹으라며 토스트가 담긴 접시를 내밀었다.

“진짜 밥 못 먹은 귀신이 붙은 것도 아니고.”

“잘 먹는 게 몸에 좋잖아요.”

어서 먹으라며 손짓하며 사쿠라이가 씩 웃었다.

“내가 먹을 때까지 쳐다볼 거야?”

“네.”

“하.”

“빨리요, 저 배고파요.”

“가서 먹어!”

“당신 먹으면요.”

간절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사쿠라이가 웃기기도 하고 귀엽기도 해서 토스트를 한입 베어 물고 됐지? 하는 표정으로 바라보니

“그거 당신이 입 댄 거니까 끝까지 다 먹어야 해요 음식 남기면 벌 받으니까.”

하며 그제야 사쿠라이도 자리에 앉아 아침밥을 먹었다.

한참 앉아 테이블에 차려진 음식을 먹는 사쿠라이를 보며 굶고 다니나 생각하던 차 나를 쳐다보는 사쿠라이와 눈이 마주쳤다.

“저는 28살이에요 당신은요?”

“갑자기?”

“그냥요. 이름은 알려주기 싫어도 나이는 알려주지 않을까 해서.”

“안 알려줄 거야.”

“뭐 그럴 거라고 생각하긴 했어요. 전 회사원이에요.”

“그런다고 내 얘기 안 해.”

“안 해도 돼요.”

“근데 왜 자꾸 네 얘기를 해.”

“아무리 생각해도 당신이 좋은 사람 같아서요.”

“사실을 알면 아닐 텐데.”

“제 직감은 그렇다고요.”

“틀렸네.”

“아닐 걸요. 당신은 그냥 지독하게 운이 나빴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요.”

“모르면서 함부로 판단하지 마.”

“기분 나빴다면 미안해요. 어쨌든 그냥 당신은 좋은 사람이라고요.”

“포기해 그렇다고 살고 싶은 마음 없으니까. 전화나 걸어 도저히 하려는 의지가 없다고.”

“그 사람한테서 도망칠 수 있는데 그래도요?”

“도망칠 자격이 있어야 도망칠 수 있는 거야. 난 그럴 자격 없어.”

“그런 자격은 누가 정하는데요?”

 

눈웃음을 지으며 질문하던 사쿠라이의 얼굴이 진지한 얼굴을 하고 나에게 물었다.

“도망칠 자격 그런 거 누가 정하냐고요. 할 수 있으면 하는 거지.”

“자격도 없고, 할 수도 없어. 그니까 따지지말고 전화나 해.”

“전화할 테니까 약속해요.”

“뭐”

“도망칠 수 있게 되면, 괜찮아질 때까지 나랑 있겠다고.”

“그래”

 

어차피 지키지 못할 약속일 테니 그냥 쉽게 대답해버렸다.

그래야 저 올곧은 눈동자를 피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사쿠라이는 야마시타에게 전화했고, 잔뜩 화가 난 야마시타가 이내 곧 호텔 방에 도착했다.

 

“하, 오노 씨 내가 실망하게 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리고 당신. 돈 받았으면 돈값을 해야지.”

“뭐야 돈 안 받았다며?”

사쿠라이가 어깨를 으쓱하며 나를 향해 웃어 보였다.

“웃어?”

야마시타가 으르렁거리듯 사쿠라이의 멱살을 잡았다.

사쿠라이는 신경 쓰지 않는 듯 야마시타를 떼어내며 귀찮다는 듯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아 더러운 손으로 어딜 만져.”

“뭐야?”

“성이 오노 인가 봐요. 이름은 다음에 들어야겠다. 아까 내가 한 말 기억하죠?”

“이 자식이 지금 나를 무시해?”

 

야마시타가 발끈하며 사쿠라이에게 주먹을 날리려고 할 때

밖에서 우당탕 소리가 들렸다.

“오노 씨, 약속한 대로 나랑 가는 거예요.”

“누구 맘대로.”

“야마시타 유우. 특수 감금 및 살해 협박 및 사주 등 의 혐의로 체포합니다. 나머지는 뭐 수사받으면서 들으시고. 변호사를 선임할 수 있고 묵비권을 행사할 수 있으며 당신이 지금부터 하는 모든 말은 법정에서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습니다.”

 

 

--

 

 

그 이후 호텔 방에서 어떻게 나가게 되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몇 번의 조사를 받고 기억하기 싫은 몇몇 기억을 끄집어낸 후 순식간에 나는 야마시타의 그늘에서 벗어났다.

나는 사쿠라이의 집에서 지내게 되었고

사쿠라이가 자신이 이런 사람이라며 야마시타가 벌인 나쁜 일들을 일망타진했다는 뉴스를 보여줬다.

 

“오노 씨가 살아있는 증거였기 때문에 덕분에 잡을 수 있었어요. 솔직히 도와주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아, 뭐 협조 안 하는 것도 이상하니까.”

“물론 중간에 오노 씨가 피운 꽃들을 보여줘야 했던 건 좀 불편했죠?”

“내가 잘못한 것도 있으니까.”

“이용당한 건 잘못이 아니에요. 그놈이 악질이었던 거지.”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워.”

“그리고 조사하면서 나온 건데 이거 오노 씨 거 같아서요.”

사쿠라이가 건넨 건 제이에게서 받은 사파이어 목걸이였다.

 

“오노 사토시. 이름 예쁘네요.”

“어떻게…”

“야마시타의 금고에 있더라고요. 당신 물건만 따로 모아둬서 다른 건 몰라도 이건 돌려줘야 할 것 같았어요. 그 선물 준 사람이랑 함께 찍힌 사진도 있는데. 그건 어떨지 몰라서 따로 가져오진 않았어요.”

 

사쿠라이가 건네준 목걸이를 차마 걸지 못하고 한참 바라보고 있으니

사쿠라이가 연신 내 반응을 살폈다.

“괜찮아요? 의사라도 불러줄까요? 아니면 그냥 안아줄까요? 위로라도 필요하면.”

“아냐 그냥… 그냥”

 

나는 차마 대답하지 못하고 지옥 저편에 묻어둔 행복했던 기억들이 몰려와 숨이 넘어가듯 울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오노 씨는 운이 나빴던 거에요. 당신이 사랑했던 사람도 운이 나빴던 거고. 당신 잘못도 아니고 잘 못 한 사람은 벌을 받았으니까, 그러니까 너무 자책하지 말아요. 주제넘은 말이겠지만, 그 사람도 분명 당신이 행복을 찾길 바랄 거에요.”

사쿠라이는 애써 나를 위로하며 방에 있을 테니 필요하면 불러달라고 했다.

자리에서 일어나는 사쿠라이를 붙잡아 품에 안겨 울었다.

아무도 나에게 너의 잘못이 아니라고 말해주지 않았다

그저 내 탓이라고

돈이 없던 것도 감당하지 못할 빚을 진 것도

갚을 수 없는 빚에 도망치려 한 선택도

도망쳐서 찾아낸 행복을 쉽게 놓쳐버린 것도

다 내 탓이라고

사쿠라이는 그냥 실수였고 운이 나빴다고 했다.

내 잘못이 아니라며, 이젠 괜찮아져도 된다고 우는 나의 등을 토닥이며 쓸어냈다.

 

 

--

 

 

사쿠라이의 집에서 지낸 지 한 달이 지났다.

몇번의 재판을 다녀왔고 야마시타는 피스틸을 이용해서 경쟁자인 스티먼을 죽인 살인 혐의가 모두 증명되었고, 조직원이 배신한 모양인지 몇 가지의 혐의가 더 추가된듯했다.

사쿠라이는 스타 검사가 되었고, 더욱 바빠져 집에 잘 들어오지 못하는 것에 미안해했다.

 

“너 진짜 웃긴 거 알아? 객식구는 나인데 주인인 네가 왜 미안해하는 거야?”

“오노 씨 그래도 혼자 있는 건 심심하잖아요. 같이 사는 집인데.”

“생활비도 한푼 못 내는데 뭐.”

“오노 씨 덕분에 스타 검사됐는데요 그리고 오노 씨 요리 잘해서 저 요즘 살찐 거 알아요?”

“내가 뭘 요리를 잘해. 그냥 네가 뭐든 잘 먹는 거야.”

“아닌데.”

“맞거든.”

“하여튼 내일은 안 늦을게요.”

“왜?”

“왜냐니. 당신 생일이잖아요.”

“아..”

“몰랐어요?”

“생일 안 챙기고 산지가 언젠데. 별로 중요하지도 않고.”

“중요해요. 진짜 중요한 날인데.”

“진짜 웃기는 녀석이라니까.”

“아 맞아 오노 씨. 생각해보니까 내가 더 나이 많던데.”

“2살 많은 게 그게 뭐.”

“그렇다고요.”

“싫으면 너도 말 놓던지.”

“그거 말고, 이름 불러도 돼요?”

“아니.”

“아쉽다.”

“설거지나 해 다 먹었으면.”

“야식까지 챙겨줘 놓고 차갑게 구는 척은. 어쨌든 내일은 안 늦을 거에요.”

“그래. 나 먼저 잔다.”

 

 

--

 

 

“진짜 안 늦으려고 했는데 하필 과장님이 부르셔서.. 진짜 딱 한 잔만 먹구 올라구했거든여?”

“술 냄새나.”

“아 오노 씨 내 말 좀 들어봐요.”

“술 냄새나 떨어져.”

“오노 씨 있자나여 나는 오노 씨가 정말 행복햇스면 조켓서여”

“떨어져.”

“진짠뎅…”

“알아서 떨어져.”

“나는 언제든 기다릴 거니까 구니까 행복해질 때도 내가 옆에서 있어주께여”

“누구 맘대로.”

“힝…”

“다 큰 놈이 징그럽게 힝이란다.”

“그렇지만 오노 씨는 맨날 내 진심을 몰라주는걸”

“알아. 그렇지만.. 아니야 너 얼른 방에 가”

“아랏서여 그래두 이 선물은 받아조요.”

“뭔데?”

“오노 씨 사진이 하나두 없어서. 그리고 많이 괜찮아진 거 같아서 그 사람이랑 같이 있던 사진 로켓으로 만들었어요.”

“너…”

“아무래도 오노 씨 행복했던 기억은 과거에 있는 거 같아서. 그리고 제발 죄책감 좀 덜어요. 오노씨덕분에 그 사람도 행복했었으니까.”

 

사쿠라이는 로켓을 건네며 내 품에 기댄 채로 잠이 들었다.

사쿠라이를 침실로 옮기고 나는 소파에 앉아 로켓에 담긴 제이의 얼굴과 함께 웃고 있는 낯선 내 얼굴을 바라봤다.

내가 이렇게도 웃을 수 있었나?

지금도 이렇게 웃을 수 있는 자격이 있나?

 

사진 속 웃는 모습에 눈물이 쏟아졌다.

 

미안해요. 제이. 내가 이렇게 괜찮아서 미안해.

 

 

--

 

 

“아, 머리야.”

“술고래.”

“아 진짜 미안해요. 약속못지켜서.”

“아냐. 선물 받았으니까.”

“맘에 들어요?”

“응.”

“다행이다.”

“있잖아 사쿠라이.”

“네?”

“내가 당장 지우진 않겠지만, 언젠가 마음먹고 꽃을 지우고 싶다고 하면. 그럼 네가 날 도와줄래?”

“언제든요..”

“그래, 고마워.”

“아, 그리고 좀 더 괜찮아지면 배우고 싶은 거나 일해보고 싶은 거 찾아봐요.”

“왜?”

“집에만 있으면 심심하니까?”

“아. 그래.”

“나랑 같이 취미도 찾아보고.”

“그래. 근데 사쿠라이.”

“네.”

“너 나 좋아해?”

“에?”

“좋아하냐고.”

“아니.. 그걸 그렇게 그런 식으로 물어보는 게…”

“좋아해 싫어해.”

“…좋아해요.”

“그래.”

“아니 근데 그거 갑자기 왜 물어봐요?”

“나중에 싫어지면 말하라고.”

“그럴 리 없을 텐데. 아니 하여튼 사람 놀리는 것도 아니고.”

“네가 나 보고 웃어줄 때 얼굴이 로켓에 있는 제이 얼굴이랑 비슷 하단 느낌이 들었거든 닮았다는 게 아니라. 좋아하는 사람에게 이런 얼굴을 하는 건가 하고 궁금했어. 사랑받아본 적이 별로 없어서.”

“아 정말 오노 씨는 진짜 좋은데 나쁜 사람이에요.”

“언제는 나보고 좋은 사람이라더니.”

“나를 막 가지고 놀잖아요. 진짜 나빴어.”

“이만큼 발전한 거에 놀라워 할 줄 알았는데?”

“그것도 그렇네요. 아 놀라서 배불러졌어. 저 그만 먹을래요.”

“오 사쿠라이가 밥을 남기네.”

“몰라요. 나, 설 거지 안 해.”

“그래라. 오늘 쉬는 날이면 같이 시장 좀 보러 가자. 차 있어야 편해.”

“뭘 얼마나 살려고요.”

“네가 많이 먹잖아.”

“아.”

 

사쿠라이의 납득하는 표정이 웃겨서 씩 웃으니 사쿠라이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왜 그래?”

“웃어서…”

“나 참.”

“웃는 거 예뻐요. 더 자주 웃어요.”

“너 하는 거 봐서.”

 

사쿠라이가 먹던 그릇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니

사쿠라이가 나를 당겨 안은 채로 말했다.

 

“고마워요. 진짜로”

“내 인생 살아보라며. 그래서 그래 너한테 고마워서 아니고.”

“이유가 뭐든 고마워요.”

“술 냄새나 떨어져.”

“아 미안해요. 근데 좀 더 안겨있으면 안될까요?”

“선 넘으면 도망친다?”

“아 나 검사에요 금방 찾는다고”

“아 하필 검사한테 걸렸네.”

“그리고 오노 씨 피스틸 관리 보호 1급이라 저 아니어도 감시하는 사람 많아요. 범죄 악용된 전적 있어서.”

“그것도 잊고 있었네.”

“그런 건 잊어도 괜찮아요. 그냥 행복해지는 거 본인 인생을 사는 거 그것만 생각하기로 해요.”

“알겠으니까 좀 놔 그릇 떨굴 것 같아.”

“네.”

 

말을 잘 듣는 게 꼭 강아지 같아 사쿠라이의 머리를 몇 번 쓰다듬고 나는 설거지를 했다.

사쿠라이는 그래도 자신이 두 살 많은 거 알고 있느냐며 볼멘소리를 냈지만.

“아, 그럼 아저씨라고 불러줘?”

“너무한 거 아니에요?”

“그럼 뭐.”

“쇼.”

“이름 불러달라고?”

“네.”

“그래. 사쿠라이.”

“아 진짜!”

“쇼, 나 어제 생일이었으니까 저녁엔 쇼가 맛있는 거 사줘.”

“오노 씨는 진짜 좋은데 나쁜 사람이에요. 소고기 사줄게요.”

“그래.”

 

나는 언제 다시 꽃을 새로 피우게 될지는 모른다.

하지만 늦게 꽃을 피우더라도 그 꽃은 불안함이 아니라 행복 속에서 피어날 아름다운 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마음이 다시 준비되면 꽃을 피울 거고 그 꽃은 지금 내 가장 근처에 있는 사람의 꽃일 것이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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