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래로 만든 성
우울 x 공삼
요 근래 사쿠라이는 원인을 알 수 없는 이유로 몹시 우울해했다. 사랑하는 멤버들, 존경하는 가족들, 넘쳐나는 일거리. 그는 저가 사랑하는 것들에 둘러싸여 자신이 왜 우울한지에 대해 고민했다. 왜 그럴까? 사실 그럴 틈조차 없는데. 분 단위로 짜인 스케쥴은 다음 달이 아닌 다 다음 달까지 이어지는 건 예사였고 그 촘촘한 스케쥴 사이로 간신히 숨돌릴 만 한 틈이 생기면 그는 일하면서는 만나기 어려운 일반인 친구들을 만나러 다녔고 보다 길게 휴식 기간을 받으면 여행을 가거나 혹은 새로운 것을 배우기 위해 이리저리로 바쁘게 뛰어다녔다. 하지만 그럼에도 지독한 권태로움은 그를 찾아왔다. 본인조차 짐작하기 힘든 이유로
왜 그럴까?
질척하고 끈적끈적한 차마 말로 형용하기 어려운, 그 감각과 감정의 편린은 마치 소낙비처럼 아무런 예고도 없이 사쿠라이를 찾아와선 그의 발치를 더럽히곤 그 흔적만 남기고 사라졌다. 만약에 이게 정말 소낙비라면 적어도 그에 대비라도 할 수도 있었을 텐데. 감정은 자연현상이 아니기에 사쿠라이가 할 수 있는 일은 슬프게도 내리는 비를 속수무책으로 맞는 일뿐이었다.
부지불식간에 사쿠라이를 찾아오던 소나기는 적어도 그가 여러 사람과 함께 있는 순간에는 내리지 않는 듯 보였기 때문에 사쿠라이는 혼자 있어야 하는 순간을 피하게 되었다. 무리하게 약속을 잡거나 괜히 밖에서 식사하고 돌아가거나 하지 않아도 될 일을 무리해서 더 한다거나 혹은 콘서트 대비 연습을 미리 한다거나. 여하튼간 그는 텅 공간에 혼자 있는 일을 최대한 피했다. 자칫 잘못하다 그 우울함에 잠겨 익사해버리지 않도록
그래서 사쿠라이는 대기실 소파에 기대어 앉아 핸드폰을 계속 만지작거렸다. 하필 오늘따라 촬영은 일찍 끝났고, 약속이 잡히지도 않았으며 미리 해두자 하고 챙겨놨던 일거리는 타 방송국에 두고 왔고, 별다른 연습이 필요한 일 역시 없었다.
아 이대로 집에 가야 하나? 하는 생각이 잠시 잠깐 그의 뇌리에 스쳤으나 그는 참말 그러기가 싫었다. 지금 당장도 목전까지 잘랑잘랑 차오른 이젠 어느 정도 익숙해진 우울함과 권태로움이 사쿠라이가 혼자가 되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그의 발치에서 기회만을 노리며 호시탐탐 그를 노렸다. 혼자 남겨지게 된다면 이 감정은 마치 해일처럼 커져 시커먼 아가리를 쩍 벌리고 사쿠라이를 잡아먹을 것이 분명해 보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계속 이곳에 머무르고 있을 수 만은 또 없는 일이어서
그래서 사쿠라이는 하는 수 없이 무거운 몸을 일으켜 집으로 돌아가려 했다. 가는 길에 술이라도 사가야지. 아니면 매니저가 사둔 술이 차에 있을 지도 몰라..
"쇼짱 오늘은 약속 없어?"
"으, 으응."
다들 바쁘다네. 사쿠라이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사람이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랐으나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애써 웃으며 대답했다. 형은 왜 아직 안 갔어? 진작 간줄 알았는데. 촬영이 끝나기가 무섭게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이 아직까지 남아있는 것이 신기했고 자신에게 말을 걸은 것도, 신기했다. 사쿠라이는 처음 겪는 일에 주책없이 두근대기 시작하는 심장을 애써 다독였다.
으음. 그것보단.. 약속 없으면 오늘은 나랑 갈래?
어, 어어?
***
아이가 웃는 소리가 들린다 코끝을 스치는 바닷바람 시야에 가득 들어차는 찬란한 햇살 누군가가 모래로 성을 쌓는다. 파도에 바위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리고 발치를 간질이는 모래 알갱이 그 사이로 바다가 파도가 들이친다. 아 그곳에 모래성을 만들면 안 돼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언가가 그에게 속삭인다.
계속 거기 있다간 파도에 휩쓸리고 말 거야
***
실례합니다- 아무도 없는 빈 공간에 사쿠라이의 작달막한 인사가 메아리처럼 울리고 그 메아리가 그들에게로 되돌아오지도 않았는데 그 공간의 주인은 아무도 없으니 그런 인사는 할 필요 없다며 후훙 하고 알코올에 잘랑잘랑 잠긴 것 같은 웃음소리를 내었다.
둘의 술자리가 2차, 3차로 이어지는 것은 드물지 않은 일이었지만, 둘의 술자리가 오노의 집으로 이어지는 것은 드물다 못해 처음 있는 일이었다. 사쿠라이가 오노의 집에 오게 된 것 역시 처음 있는 일이었고
최근에 오노가 임시로 빌렸다던 그의 작업실 역시 얼마 전에 처음 가본 것이었다. (본래의 작업실도 아직 가본 적은 없지만) 그나마도 이번 전시회 준비나 넷*릭스 촬영이 아니었다면 그 작업실 대여 기간이 끝날 때까지 못 가봤을 것이 분명했다. 사실 오노는.. 뭐라고 표현하는 것이 좋을까? 흔히 공과 사의 구별이 철저한 사람이라고 평가되곤 하지만 사쿠라이가 볼 때 오노는 공과 사의 구별이 철저하다기보다는 그저 혼자 있을 수 있는 시간을 지독하게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 홀로 있을 수 있는 시간을 제아무리 오래 알고 지낸 멤버라 할지라도 타인과 공유하는 것을 힘들어하는 것뿐이었다.
그런 오노의 성정을 잘 알고 있던 사쿠라이는 그의 성향을 존중했다. 자신이 사람과 만나며 활기를 얻는 사람이라면 오노는 정확히 그 반대되는 사람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쿠라이는 굳이 그의 쉬는 시간을 애써 방해하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렇게 되는 것을 피하려 노력했다. 자신이 오노의 쉬는 시간을 침범해 그가 제때 쉬지 못하게 하는 것도 싫었고 자신의 어리광 아닌 어리광을 오노가 받아주는 것 역시 싫었다. 단호할 때는 단호하기 짝이 없는 양반이 자신의 선 안의 사람에겐 한없이 무른 사람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더
그리고 사쿠라이는 모래로 애써 성을 지었다가 그것이 파도에 휩쓸려 산산이 부서지는 것만큼은 보고 싶지 않았다.
술을 마시고 이야기를 나누고 문어를 잘라서 먹고 다시 술을 만들었다가 문어에 고추냉이를 너무 많이 올려 맵다며 온 얼굴을 찌그러트리고 웃는 당신을 보며 함께 웃었다가 어느 틈엔가 잠들어버린 당신을 보고 홀로 가슴 떨려 하다가... 한참을, 자는 이의 얼굴을 내려다보던 사쿠라이는 그에게서 시선을 돌리기 위해 테이블 위 아무렇게나 놓여 있던 술잔 하나를 들었다. 꼴꼴꼴 도수 높은 알코올이 사쿠라이가 그 동안 삼키고 삼켜왔던 감정이나 오열처럼 식도를 타고 막힘 없이 흘러내렸다. 술잔을 기울이다가도 저 자신도 모르게 술에 취해 잠든 이를 내려다볼 때면 사춘기였을 적에나 겪었던 충동의 소용돌이가 다시 그 얄팍한 유리잔 속에서 휘몰아치는 것 같았다.
사쿠라이는 오노와 함께 데뷔한 순간부터, 아니 무대 위에서 춤추는 모습을 보았을 때부터 어쩌면 그를 처음 본 그 순간부터.
숨이 막혔다.
그가 웃음을 지을 때 슬쩍 드러나는 덧니를 볼 때나 춤을 추고 나서 숨 가쁘게 갈비뼈가 오르락내리락 하는 모습을 볼 때나 애써 말을 지어내려 입술을 달싹이는 모습을 볼 때면 사쿠라이는 무심코 호흡을 멈췄다. 이 나이를 먹고도 달라진 것은 없어서 사쿠라이를 여전히 오노를 바라볼 때면 가슴 한쪽이 지끈거리고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아직 여물지 못했던 그 시절 사쿠라이는 그런 제 감정이 거슬린다고 생각했다. 마치 손톱에 일어난 거스러미처럼 자꾸만 신경 쓰이고 거슬렸다. 시간이 흐르면 괜찮아지리라 애써 자신을 위로했으나 감정이라는 것은 손톱에 일은 거스러미 잘라버리듯, 잘라버릴 수가 없어서
결국 그는 스스로를 궁지로 몰았다. 해소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고 거센 파도는 그에게 쉴 틈도 주지 않고 계속해서 밀려 들어왔다. 마치 바다처럼 사쿠라이의 목까지 차오르는 오노의 상냥하고 다정한 말과 단어들, 온화한 눈동자는 사쿠라이에게 혹시나 하는 희망을 품게 했다가 그를 쥐고 흔들었다가 종국에는 병 속에 담긴 벌을 바닥에 내던지듯 그를 내동댕이쳤다.
애써 시선을 돌리려고 했던 것이 무색하게 돌고 돌았던 생각, 시선의 종착지는 결국 또다시 오노여서 사쿠라이는 헛웃음을 터트렸다. 가지런히 눈을 감고 색색 사랑스러운 소리를 내며 무방비하게 잠든, 사랑하는 당신. 사쿠라이는 저도 모르게 몸을 천천히 기울였다. 의식 할 새도 없이 닿고자 하는 열망이 머릿속을 꽉 매웠다. 그는 꼼짝도 하지 못하고 꽃잎 흔들리듯 천천히 열렸다 닫혔다 하는 오노의 입술에 가까이 다가가 숨을 최대한 깊게 들이마셨다. 폐부 끝까지 빠듯하게 차오르는 상대방의 체향. 따뜻하고 촉촉한 감각...
"형, 나는, 나는 더는 무리야."
그는 상대방은 듣지 못할 고백을 속삭인다.
미안, 무리야. 형에 대한 감정을 주체할 수가 없어. 내 마음대로, 잘 되지가 않아. 내가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숨기려 해도 자꾸 생각이 나서, 도저히 숨길 수가 없어서..
그럼에도 말할 수는 또, 없어서...
끄끝내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한 말들이 머릿속에서 휘몰아치고 가슴께를 죄이게 했다. 참고 참았던 눈물은 상대에게 품었던 감정을 더 날카롭고 뾰족하게 만들었다. 그 송곳과도 같은 첨예함 앞에 사쿠라이는 지극히 무력했다.
그는 잠든 이의 입술을 몰래 훔치고 가증스럽기 짝이 없게도 눈물을 흘렸다. 그것은 자기연민에 빠진 사람의 것이기도 했고 갈 곳 잃은 연정에 아무것도 할 수 없어 홀로 침몰해가는 사람의 것이기도 했다. 만약에 사람의 이름이 불려서 닳는 것이었다면 아마 내 안에선 당신의 이름은 닳아 없어지다 못해 이미 먼지가 되어 어디론가로 사라져 버렸을 것이다. 목이 터지라 외치면 고개를 뒤로나 돌아볼까? 눈이 녹아 내리도록 운다면 시선 한 점 받을 수 있을까... 사쿠라이는 그의 평생을 사는 동안 한 발짝 뗄 용기가 없어 오노의 등 뒤에서만 가만히 머무르고 있었다
당신과 나와의 관계는 마치 모래로 만든 성 같은 것 이었다지. 완성 직후에는 선명하게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낼지라도 바람 한 점 불면 파도가 몰아치면 휩쓸려 어디론가로 사라져 흔적조차 남지 않는,
사쿠라이는 비로소 제가 우울한 이유를 깨달았다.
저가 그를 사랑해서,
그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아서.
***
눈을 감았다 뜨니 사방이 깜깜했다. 빛나는 무언가가 꼬리를 길게 물고 바다 아래로 떨어진 것은 내 착각일까? 온 사방엔 모래사장뿐이었고 저 멀리 어디선가 파도 치는 소리가 들렸다. 별도, 달도 뜨지 않을 겨울 밤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