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Kickoff!
스포츠 선수-스포츠 캐스터 x 등산 마스터
“…사토시 말이야.”
“응?”
사쿠라이 선수랑 무슨 관계야? 별 다른 전조도 없이 불쑥 튀어나온 마츠모토의 그 말에 오노는 커피를 뽑으려던 손을 멈출 수 밖에 없었다. 사쿠라이, 선수? 한박자 늦게 입에서 흘러나온 그 중얼거림을 곧바로 주워낸 마츠모토는 모르는 척 하지 말라며 한숨을 쉴 뿐이었다. 당신 국내 축구 경기 담당이잖아. 그렇지. 그런데 사쿠라이를 모른다고? 이제는 따지는 듯이 변한 마츠모토의 말을 어떻게든 무시하기로 결정한 오노는 다시 정신을 차리고 눈앞의 버튼을 눌렀다. 삑. 물론 종이컵이 떨어지고 쪼르르 나오는 새까만 커피줄기를 바라본다 한들, 마츠모토의 말은 멈출 기세가 없었다.
“알잖아, 사쿠라이 선수.”
“그래, 알지.”
“그냥 아는 것도 아니고 엄청 잘 아는 선수잖아.”
어제도 그렇게 신나게 떠들어놓고선. 오노는 마츠모토의 그 말까지는 무시할 수 없었다. 뜨거운 커피를 놓칠 것 같아서 간신히 손에 더 힘을 주자, 이번엔 그 안에 아슬아슬 담겨있던 커피가 종이컵 밖으로 흘러넘쳤다. 아, 앗 뜨거! 뜨거움에 발을 구르는 오노에게 심드렁한 표정으로 어디서 구해온 지 모를 휴지를 건네주고, 마츠모토는 그대로 오노를 추궁했다. 신나게 떠들었다는 자각은 있냐, 라는. 오노 자신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을 입에 담으면서.
등 번호 2번. 오른쪽 윙백 포지션의 사쿠라이 쇼. 그를 모른다는 것은 말이 안되는 소리나 마찬가지였다. 국내 축구계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왔다며 여러 뉴스에서 화제가 된 것도 모자라, 어쩜 생긴 것 까지 아이돌이라고 인터넷을 떠들썩하게 만든 그 장본인을 모르는 사람은 현 일본 사회에 거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나도 그냥 그런 것만 알 뿐이야, 너도 아는 그런 거. 목 너머로 쓴 커피를 어떻게든 넘겨가며 오노는 인상을 찌푸렸다. 캐스터로서 알아야 할 정보를, 그냥, 아는 것 뿐이라고. 행여나 마츠모토가 알아듣지 못했을까봐 딱딱 끊어가며 말했건만. 마츠모토의 반응은 심드렁했다. 팔짱을 끼고 마음에 들지 않는 다는 듯 쳐다보는 그 시선이 부담스러워, 오노는 급히 가볼 곳이 있다며 짧은 커피 타임을 마치고 쫓기듯이 그곳을 벗어났다.
“-사쿠라이 선수, 오늘로 벌써 두 번째 골을…!”
내가, 왜 그랬더라. 흥분에 가득 찬 목소리로 사쿠라이의 골 소식에 대해 말하던 자신이 기억에 선명해, 오노는 모르는 척을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었다. 왜 그렇게 신이 나게 말했던걸까. 가끔가다가 오늘 캐스터일을 되돌아보기 위해 영상을 재생하면 평소엔 조용한 캐스터로 불리는 그 오노 사토시가 흥분을 감추지 못한 목소리인 것이 귓가에 꽂히듯이 들려와, 오노는 항상 고개를 돌려버리고 싶었다. 사쿠라이의 일이 되면 이상하게 냉정할 수가 없었다. 아니, 이상한 일은 아니지.
등 번호 2번의 새로운 바람이, 오노 사토시에게 있어서는 평생 잊고 살 줄 알았던 과거의 바람이었으니까.
오노 사토시는 사쿠라이 쇼가 누구인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축구 선수이자 인터넷의 뜨거운 감자인 사쿠라이 쇼가 아닌, 그 이름들을 가지기 전의 사쿠라이 쇼를 말이다. 쇼 군, 분명히 그땐 그렇게 불렀었지. 이제는 잊고 있던 기억이나 마찬가지인 모습의 사쿠라이를 오노는 간신히 끄집어내었다. 이게 얼마 만이야, 사쿠라이 쇼. 솔직히 말하자면, 오노는 사쿠라이와 이런 식으로 재회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대학 다닐 때 잠깐 알고 지내던 사이 라고 한다면 많이 생략된 표현이었지만, 오노는 만약 미래에 사쿠라이의 이야기를 꺼낸다면 그와의 관계를 이런 식으로 말하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
사실, 내 대학 시절 전 애인이야. 오노에게는 긴장감이 감도는 그 장소에서 마츠모토에게 그렇게 말할 자신이 없었다. 그런데 그때 잘 헤어져 놓고는 이제 와서 구질구질하게 얼굴만 봐도 좋아서 그러는 거야. 이렇게 말할 자신은 더더욱 없었고. 그래서 얼버무렸던 것이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쭉 이런 식으로 얼버무리겠지. 하필 유명인이 되어도 축구선수, 하필 들어가도 자신이 자주 담당하는 팀이라니. 처음 사쿠라이의 이름을 경기 정보에서 읽었을 때 오노는 간절히 바랐던 것이다. 제발 제가 담당하게 해주세요, 아니, 담당하지 않게, 아니, 역시….
“사토시 군, 정말 이렇게 끝이야?”
“응. 지금의 너에게 더 중요한 것을, 내가 골라줄게.”
밖은 해가 쨍쨍한데, 눈이 펑펑 오던 날의 기억이 괜히 떠올라 오노는 세차게 머리를 흔들었다. 하필 떠올려도 이걸 떠올리지. 이게 다 마츠모토가 쓸데없이 말을 걸어온 탓이다. 사쿠라이의 일이 되면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것은 그의 경기에 캐스터로 들어간 지 채 이틀도 되지 않아 오노 스스로 자각한 것이었다. 그러니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어떻게든 자제할 방법을 찾았을 텐데. 쓸데없는 기억을 괜히 떠올렸다는 생각에, 오노는 제 어깨가 무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피곤하다. 이미 다 지나버린 일이고, 사쿠라이는 지금 자신과 마주해도 아마 자신이 누구인지도 기억하지 못할 텐데. 왜 나만 괴로워야 하냐며, 오노의 소리 없는 아우성이 복도를 꽉 매웠다.
진짜 마츠준 탓이야. 괜히 눈에 보이지 않는 마츠모토의 탓을 하면서 오노는 시계를 확인했다. 캐스터 일을 해야 하는 경기까지 세시간 정도 있는데, 이 틈에 잠깐 낮잠이라도 잘까. 그래, 한숨 자면 전부 잊어버릴 수 있을 것이다. 사쿠라이에 대한 것도, 그 동그란 눈도, 사랑스럽단 눈빛도, 조곤거리던 목소리도. 그런 느슨한 생각을 하며 오노는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눌렀다. 지금부터 자러 갈 거면 한시가 급했다. 적당히 딱딱한 소파에 머리를 대고 자고 일어나서, 정신 차리고 일을 하자.
“오, 돌아가려고?”
“아. 니노. 아니, 아직 하나 더…”
운도 좋지. 방송국 내에서 아는 사람이 몇 없는 오노가 친하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니노미야와 떡하니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치게 된 오노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문이 점점 열리고 보이는 반가운 얼굴에 오노가 말을 끝맺기도 전에, 오노는 마주치고야 말았다. 손에 서류철을 잔뜩 든 니노미야의 바로 옆에, 양복을 입고 붉은 와인색 넥타이를 맨 남자와. 어, 하는 목소리는 오노 자신의 목에서 나온 것인지, 아니면 남자의 입에서 나온 것인지. 삑. 삑. 문이 닫히지 않아 삑삑거리기 시작하는 엘리베이터 소리가 들리고서야 얼른 안 들어오고 뭐 하냐는 니노미야의 궁시렁거리는 소리에 오노는 간신히 발을 옮겼다. 이럴 수가. 천국으로 가는 엘리베이터인 줄 알았는데 지옥 급행열차라니요. 층이 올라갈수록 편해졌어야 하는 오노의 마음은 이제 층이 올라갈수록 무거워지고 있었다. 너무 긴장한 나머지, 자신이 내려야 하는 층을 누르는 것도 완전히 잊어버리기까지 하고.
“오노 씨 그러고 보니까 사쿠라이 씨 좋아하지 않았어?”
“어?! 아, 아니야.”
“영상자료 보니까 아주 신나서 떠들더만, 아저씨.”
하필 본인 앞에서 이런 말을 꺼내면 어쩌자는 건가. 조금의 반항을 담아 오노는 사쿠라이 몰래 니노미야의 발을 꾹 밟았지만, 니노미야는 아랑곳 않은 채 오노를 보고 실실 웃고 있었다. 아. 재미있다, 이거지? 아직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멀뚱히 오노와 니노미야의 대화를 듣던 사쿠라이가 신경 쓰였는지, 니노미야는 사쿠라이의 어깨에 팔을 걸치며 다 들으라는 식으로 소곤거렸다.
“여기 오노 씨, 스포츠 캐스터인데 사쿠라이 씨만 나오면 엄청 흥분해선….”
“니노.”
“아, 이야기는 많이 들었습니다. 사토, 아니, 오노 씨.”
사토? 들을 리 없었을 것 같은 옛 호칭을 기억나게 하는 말에 오노는 반응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 어쩌면 귀의 착각일지도 몰라. 그런 생각을 하며 애써 엘리베이터의 층을 확인해보던 오노는 이제야 자신이 내려야 할 층을 놓쳐버린 것을 깨달았다. 어쩐지 넋 놓고 있더라, 아저씨. 할 일도 없는 거 아니냐며, 그동안 사쿠라이 선수의 말 상대나 해달라며 만면의 미소로 웃던 니노미야는 예능국 층에 멈춰선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자 마자 쌩 하고 뛰쳐 나가버린 것이었다. 나 내려갈 거라고! 마지막으로 절규하듯 외친 그 도움 요청을 깡그리 무시한 니노미야는 10초도 되지 않아 시야에서 사라졌다. 로비에 사쿠라이와 오노만을 덩그러니 남긴 채로.
아, 지금 절대 옆 보지 말자. 오노는 머리 뒤에 눈이 달린 것은 아니었지만, 누군가가 자신을 보고 있는 시선은 기가막히게 잘 느끼는 편이었다. 그리고 그 감이 말해주길, 지금 오노의 옆에 서 있는 사쿠라이 쇼는 아주 뚫어져라 오노를 바라보고 있을 것이었다. 여기저기서 스태프들에게 지시하는 목소리가 뛰어다니는 예능국의 한가운데에서 오노와 사쿠라이는 미아 마냥 가만히 서 있었다. 허튼 움직임을 하면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생각에, 오노의 발걸음은 추라도 달린 듯이 무거웠다.
“그, 그러고 보니 사쿠라이 씨는 어쩌다 오늘 여기 오신 건가요?”
“아. 영광스럽게도 예능 프로그램에 나와달라고 들어서요.”
“선수 생활도 힘드실 텐데.”
“불러주시는 게 기쁜 일이죠.”
대기실까지 가는 길이 어색해, 오노가 고심하며 고른 말들을 사쿠라이는 아주 착실하게 주워주고 있었다. 끊김 없이 편안하게 흘러가는 대화. 전에도 이런 적이 있지 않았던가? 애써 감춰두었던 빛바랜 추억이 한둘씩 돌아오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기 전에, 오노는 이 자리를 벗어나야 할 이유가 있었다. 계속 미루다가는 분명히 쓸데없는 말을 해버릴 것이 분명했으니까. 아직도 밥은 많이 먹고 다니냐는 질문이라던지, 내가 골라준 그 길을 너는 아주 잘 가고 있는 것 같다는 쓸데없는 한마디 까지. 참으로 구질구질하게도.
“여기가 대기실이에요.”
“감사합니다, 오노 씨.”
“원래는 니노가 안내 해야 했는데. 그럼 촬영 힘내세요.”
이만 가볼게요. 오노는 분명 그 말을 하려고 열었던 입이었다. 괜한 말을 하지 않고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는 그 순간에, 오노는 실수를 저지르고야 만 것이었다. 사토시 군. 아주 명확히도 들린 그 이름에. 공손하게 문을 열고 나가려던 손은 어리석게도 멈추어버리고 말았다. 마치 시간이라도 멈춰버린 것 마냥, 오노는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다. 제 기억보다 훨씬 다정한 그 목소리, 그 망할 목소리 때문에. 다시 걸음을 옮기기엔 오노는 자신이 사쿠라이의 부름에 대답한 것이나 마찬가지인 상황이란 것을 깨달았다. 망했다. 완전히. 모든 것이 다.
오노가 움직임을 멈춘 것을 확인 한 사쿠라이는, 이번에는 확신을 담아 오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아직, 시간 있지 않아요? 자러 가려고요. 이 상황에? 전부 알고 있다는 듯이 말하는 그 목소리에 오노는 우물쭈물 하면서 변명거리를 찾았다. 니노에게 할 말이 있다고 할까? 아니면 급한 일이 있다고라도? 하지만 어설픈 대답은 의심을 살 것이고, 사쿠라이는 분명 거짓말 같은 건 단숨에 눈치챌 것이었다. 적어도 예전에는 그랬었으니까. 그렇기에 오노는 침묵했다. 몸은 움찔거렸지만, 입 만큼은 꾹 다물었다. 괜한 소리를 하지 않기 위해서라는 그 시도는 좋았다.
“…티비에서는 좋아라 하고 이야기 하더니.”
“뭐?”
사쿠라이의 도발에 곧바로 넘어가버려, 별 소득 없이 오노의 입 다물고 모르는 척 하는 시도는 끝나버렸지만 말이다. 아, 그러고 보니 가끔 토라지면 이렇게 툭 하고 뱉듯이 말했던가. 기억 속 깊은 곳, 먼지가 쌓인 책장에서 ‘사쿠라이 쇼 대응법’이라 적힌 책을 빼 오며 오노는 사쿠라이를 쳐다보았다. 이런 얼굴로, 이런 목소리로 말했었지. 줄곧 중개를 하면서 알고 있었고, 인터넷에서 인터뷰를 보면서도 알고 있었지만 지금 그가 짓는 표정이나 목소리는 그 어느 곳에도 실려있지 않는 모습이란 것을 오노는 잘 알고 있었다. 살짝 기분이 나쁜 듯이 인상을 찌푸리곤, 깊은 한숨을 내쉬며 툭 던지듯이 말하는 목소리. 어디까지나 오노에게나 보여주었던, 대학 시절 연인이었던 사쿠라이 쇼의 모습. 그 모습에 마음을 빼앗기기라도 한 것일까. 오노는 문을 열려던 것을 관두고 되려 문을 잠그며 사쿠라이에게로 걸어갔다.
“봤어?”
“경기 내용은 다시 봐야하는데, 캐스터 있는 방송이 보기 편하더라고요.”
“그으래.”
“물론 형이 캐스터가 될 줄은 몰랐지만요.”
그래서 어때요, 제 갈 길 올바르게 간 제 모습은. 살짝 날이 서 있는 그 말투에 오노는 할 말을 찾으며 살짝 시선을 돌렸다. 오노가 정해준 사쿠라이의 길. 연애와 미래의 성공을 두고 자신은 둘 다 하겠다며 당차게 말했던 그 어린 날의 사쿠라이의 모습이 이곳에 그대로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오노는 그 결정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하지만 자존심이 있지, 어떻게 본인에게 그걸 말한단 말인가? 사실 나 후회하고, 네가 나를 붙잡기를 바랬고, 이제 와서 구질구질하게 다 떠나간 전 애인 행적이나 밟고 있어. 오노는 이런 말들을 뻔뻔하게 입에 담을 만큼의 사람은 아니었다.
“그때 그렇게 헤어지는 게 아니었는데.”
물론 사쿠라이 쇼는, 달랐지만.
적당히 웃어넘기고 끝낼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사쿠라이는 쌓여있던 것이 많았는지, 대기실의 소파에 앉아 오노에게 맞은편 자리를 권했다. 사쿠라이 씨, 전 가봐야 할 곳이 있어서요. 입으론 일부러 동요하지 않은 척을 해도 오노의 몸은 솔직하게 사쿠라이가 권한 자리에 앉아버리고 말았다. 아, 여기 앉아서 대체 뭘 하려고. 아까 대기실에 들어섰을 때부터 시작된 두통은 이제 신경이 쓰일 정도로 오노의 머리를 때리고 있었다. 그러게, 왜, 반응을, 해서는! 한방씩 머리가 울리는 느낌에 오노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하지.
저 만나면 할 말 없었어요? 대답을 바라는 듯,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툭툭 치면서 묻는 사쿠라이의 목소리에 오노는 고개를 저었다. 없었어, 이렇게 만날 줄도 몰랐고. 뻔히 보이는 거짓말을 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사쿠라이의 손가락은 멈추었지만, 그런데도 오노는 더 말하고 싶진 않았다. 이제 와서 무슨 상관인가 싶지만, 그래도 나름의 자존심 때문에. 그놈의, 자존심 때문에 말이다.
“…형이 뭘 하고 지낼까 궁금했어요.”
“잘, 지냈지.”
“내 이야기를 하는 모습이 즐거워 보였는데.”
옛날 생각이라도 났나 봐, 사토시 군. 정곡을 찌르는 그 말에 오노는 아까 전부터 손에 꽉 쥐고 있던 다 마신 종이컵을 더 강하게 구겨버렸다. 그래, 즐거웠어. 잘 하는 선수여서 즐거웠던 거야. 네가 사쿠라이 쇼 여서 그런 게 아니고, 축구계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온 선수라서 즐거웠던 거야. 방금 전까지 생각하던 것과 정반대의 말을 내뱉는 오노의 모습은 두 번 봐주긴 힘들었는지, 사쿠라이는 곧바로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테이블 너머 오노에게로 몸을 가까이 해왔다. 정말, 그런 이유로?
마지막으로 얼굴을 마주했던 그 겨울날, 너는 이런 얼굴을 했던가. 지끈거리던 머릿속에서 가장 선명했던 그 기억이 꺼내진 탓에 오노는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정말 그것이 형이 바라는 거냐며, 사토시 군이 바라는 것이라면 저는 해내겠지만 더 좋은 길이 있지 않겠냐는. 실망과, 간절함과, 아쉬움과, 알 수 없는 감정들이 뒤섞인 그 눈. 그라운드 위에서는 절대 볼 수 없는 인간 사쿠라이 쇼의 감정들. 그 모든 것이 온전히 저에게 향해있다는 사실에 오노는 질끈 눈을 감았다. 예고도 없이 눈이 쏟아질 것만 같아서. 이미 끝난 일에 다시 한번 기회가 주어진 것만 같아서.
“사토시 군, 정말 이렇게 끝이야?”
그 겨울날과 완전히 같은 목소리로, 같은 말로 물어오는 사쿠라이의 모습은 오노에게 그것이 새로이 과거를 뒤집어씌울 수 있게 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착각마저 들게 했다. 분명 대기실 안에서 얼굴을 마주하고 있었는데. 오노의 눈앞에 있는 사쿠라이는 흑발이 아닌 살짝 옅은 갈색 머리였고, 입고 있는 옷은 양복이 아닌 캐주얼한 후드였으며, 사방에서는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몇 년 전, 바로 그 모습 그대로의 사쿠라이 쇼. 그리고 그의 앞에서 깊은 숨을 내쉬는, 미래의 오노 사토시. 째깍, 째깍. 유난히 큰 대기실의 시곗바늘 소리는 오노에게 마치 멈춰져 있던 과거의 기억이 흘러가기 시작하는 것 마냥 느껴졌다. 대답을 바라는 눈빛에 오노는 이제 결정을 해야만했다.
후회를 내던지거나, 아니면 과거를 반복하던가.
“지금의 나에게 더 중요한 것을, 이번엔 네가 골라줘.”
쇼 군. 기나긴 시간이 지나고 부르는 그 이름은 어색하지 않아서, 오노는 나름 진지했던 표정을 풀어버리며 그만 웃어버리고야 말았다. 한참을 사쿠라이 선수, 사쿠라이 씨. 입에 맞지도 않게 불러왔는데 쇼 군 이라고 부르는 것이 이렇게나 간단할 줄이야. 오노는 알고 있었다. 만약 저의 길이 다시 한번 사쿠라이의 길과 교차하는 순간이 온다면, 그 기적 같은 순간에 자신은 분명 새로운 선택을 할 것이란 것을. 사쿠라이가 기억하지 못해도 그를 눈앞에서 추억하며, 사실은 참 많이도 사랑했노라 말할 것이라고. 오노는 그저 눈을 돌려왔던 것 뿐이었다. 뛰어난 선수가 되어 다시 시선에 들어온 그를 놓을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 모든 것을 존경과 동경이라는 이름의 포장지로 뒤덮었다.
“…오노 씨, 형, 사토시 군.”
이제는 당신을 고를 수 있게 해줘요. 값싸고 잘 찢어지는 것이라면, 굳이 포장지라 부를 이유는 없을 텐데. 사쿠라이의 손짓 한 번으로, 눈빛 한 번으로 벗겨질 포장지라면 과연 그 모든 것에 의미는 있던걸까. 엉성하게 붙어있던 테이프도, 의미 없이 묶여있던 리본 매듭도. 하나 둘 씩 손쉽게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 가운데에서 비로소 향해야 할 곳을 향해 모습을 드러낸, 벌거벗겨진 마음. 째깍 째깍. 사쿠라이는 비로소 바라디 바라던 것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눈길 위에 나 있던 발자국을 쫓고 쫓아 새로운 태양 아래에서 드디어 손을 붙잡을 수 있었다. 사토시 군. 그런 사쿠라이가 싫지는 않은지, 오노는 말없이 그를 끌어안았다. 받는 사람도 쓰여 있지 않던 그 포장지를 마치 제 것마냥 벗겨낸 주인을 위해서라도 많은 말을 많은 채 그저 가만히 있었다.
“…내일부턴 사토시 군을 위해서 세레모니 할게.”
“반응 하기 힘드니까 그러지는 마.”
서로의 기억 속에 묻어두었던 끝없는 겨울은 체온의 따듯함으로 녹아내렸다. 눈이 사라지고 나타난, 싱그런 잔디가 빛나는 그라운드. 그곳에 선 사쿠라이 쇼와, 그런 사쿠라이의 모습을 열띠게 전하는 오노 사토시. 다른 사람들이 보면 분명 아무것도 바뀌지 않은 그 곳에서 사쿠라이와 오노는 새로운 경기의 시작을 알리는 휘슬을 기다렸다. 같은 경기를 뛰고 있는 것이 아닌데도, 직접적으로 시선이 맞닿는 것도 아닌데도. 그럼에도 오늘부터는 분명히 같은 마음이라는 안심감이 멀리 떨어진 두 사람을 움직였다. 오노 씨, 사쿠라이 선수. 사토시 군, 쇼 군. 공 하나로 경기가 바뀌듯, 오노와 사쿠라이 또한 한 번의 만남으로 미루어졌던 경기를 시작 할 수 있었다.
삐익.
기다리고 기다려온 새로운 사랑의 킥오프를 알리는 휘슬 소리가 울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