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윗사람의 아랫사정
리맨물 x 바르
사쿠라이는 새 회사가 제법 마음에 들었다. 내부도 깔끔했고 시설도 잘 갖추어져 있었지만 가장 만족스러운 회사 내 분위기였다. 6시가 되면 아무도 상사의 눈치를 보지 않고 바로 퇴근 준비를 했다. 그 광경에 놀랄지언정 몸은 기쁜 마음으로 가방을 싸는 사쿠라이였다. 술을 마시다가도 가고싶을 때 바로 가야 직성이 풀리는 그에게는 최고의 환경이었다. 이런 회사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에 놀랄 뿐이었다. 옆자리 선임에게 묻자 사장의 지시였다는 답이 돌아와 한층 그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본디 윗사람이라는 것들은 아랫사람들의 야근을 바라는 것이 당연한데, 사장의 자리에서 그런 요구를 하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사장님이 정시퇴근하라고 말씀하셨다고요?”
제대로 들었음에도 다시 물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기뻤다. 회사에 취직해서 이렇게 깔끔한 퇴근을 하게 되다니, 꿈만 같다고 표현할 정도였다. 그 외에도 깔끔하게 정리된 탕비실과 각자 필요한 것을 직접 챙기는 문화까지, 불편할 새도 없을 정도였다. 이쯤 되니 사장이라는 사람의 존재가 궁금해질 정도였다.
그러다 어느 날, 사쿠라이가 말로만 듣던 사장을 만날 기회가 생겼다. 사람들이 전부 바빠 사장실로 직접 결재를 받으러 가라는 선임의 지시 때문이었다. 말이 되는 요구인가 싶었지만 하나같이 우리 쪽에서 동의한 걸로 하고 바로 사장실에 가라고 전달받았다는 말만 반복하니 어쩔 도리가 없었다. 결국 사쿠라이는 결재 받을 서류를 챙겨 자리를 떴다. 살짝은 두근대고 조금은 떨리는 가슴팍 안쪽에 서류를 꽉 끌어안고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그리곤 12층으로 가는 버튼을 조심스레 눌렀다. 회사에 들어오자마자 사장실이라니, 이것 또한 상상조차 하지 못한 그림이었다. 이 회사가 뭐길래 예상 밖의 일들로만 가득한 건지, 사쿠라이가 투덜거림을 멈출 때쯤, 엘리베이터도 멈춰 문을 열었다. 저 멀리로 사장실 앞 비서가 보였다.
“사쿠라이씨죠?”
“네, 맞습니다.”
“안쪽으로 들어오시죠.”
비서가 무거워보이는 문을 천천히 열며 안내했다. 방은 매우 커다랬고 시선이 반대편 벽에 닿으려 할 때 그곳에 사장의 책상이 있었다. 내부는 소음 하나 없이 아주 조용하고 엄숙했다. 누구 하나 먼저 말을 트지 않는다면 공기에 눌려 질식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결재할 서류.”
멍하니 사장실 이곳저곳을 저도 모르게 눈을 훑는 도중에 차분하게 내려앉은 목소리가 사쿠라이의 귀로 흘러들어왔다. 그제서야 자신이 무례하게 여기저기 시선으로 기웃거리고 있다는 걸 깨달은 그는 퍼뜩 자세를 다잡고 사장에게로 눈을 돌렸다. 그리곤 재빨리 서류를 건넸다.
“여깄습니다.”
서류를 타고 올라간 사쿠라이의 궁금증 어린 시선은 곧 사장이라는 자의 얼굴에 도달했다. 매끈하게 탄 피부는 마치 부드럽고 달콤한 밀크초콜릿을 닮았고, 모난 곳 없이 둥글고 깔끔한 윤곽은 흡사 연예인과도 같았다. 그에 비해 남자다운 손은 손가락이 길고 핏줄이 도드라져 얼굴에선 느낄 수 없었던 강인함마저 표하고 있었다. 오늘 처음 본 상대인데도 사쿠라이는 그에게 끌리고 있었다. 얼굴은 아무렇지 않은 척하고 있고 머리로는 서류내용을 곱씹고 있었지만 어렴풋하게 알 수 있었다. 한눈에 반했다는 것을. 그가 한참 사장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서류가 그의 손에 돌아와있었다. 급하게 인사를 하고 들어올린 고개 앞에서 반짝이는 이름을 발견할 수 있었다.
오노 사토시
번쩍이는 명패에 딱 맞는 이름이라고 멋대로 생각하며 그대로 돌아 사장실을 나왔다. 그거 말고도 하나 더 신경 쓰이는 게 있었는데, 바로 사장실 안을 가득 채운 달콤한 향이었다. 어떤 향초라거나 어떤 향이라고 확실하게 설명할 수 없는 오묘한 냄새였는데, 맡는 내내 뒷목이 당기면서 어딘가 마음이 상기되는 기분이었다. 어디선가 맡아본 것 같이 느껴지기도 했다. 향수라고 하기에도 꽤 진해서 사쿠라이가 자신의 자리로 돌아갈 때까지도 그 향은 코에서 계속 맴돌았는데, 옆자리 사람들은 딱히 신경 쓰지 않는 듯 했다.
사쿠라이보다 안절부절 못 하는 것은 오노 쪽에 가까웠다. 그가 왔다 간 이후로 줄곧 오노는 아랫배 안쪽이 근질근질하고 몸이 배배 꼬이려고만 하는 것 같았다. 분명 인사팀에 신입사원은 베타로만 구성하라고 해놓았으니 알파가 들어왔을 리는 없는데 이상하게 몸이 먼저 반응했다. 이번에 처음 들어왔다는 사쿠라이가 사장실에 발을 들인 순간부터 오노는 자세를 바르게 하고 앉아있는 것만으로도 버거울 정도였다. 여차하면 먹으려고 억제제도 손바닥 안에 숨겨둘 정도였다. 사쿠라이가 부디 자신이 오메가라는 것을 몰랐으면, 하고 바랄 수밖에 없었다. 오노는 우성 오메가였기 때문에, 비서를 시켜 방안을 탈취하고 깨끗하게 청소해 간신히 향을 옅게 만들어 그 정도였던 것이다. 오메가인 걸 들키면 틀림없이 그 자리에서 내려와야 할 게 뻔했다. 더구나 사쿠라이가 오노라면 꼼짝없이 그에게 당할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몸은 이성과 달라서 집에 도착해 다 씻고 침대에 누워서마저 사쿠라이의 체취를 기억했다. 어쩌면 여태 찾지 못했던 자신의 파트너가 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얼핏 드는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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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비슷한 정장을 입고 회사로 나선 사쿠라이는 묘하게 신경 쓰이는 향을 여전히 곱씹고 있었다. 어디선가 맡아본 기억이 있는 관능적이고 달콤한 향, 그 냄새의 정체를 알아내지 않으면 오늘밤 잠을 잘 수 없을 것 같았다. 그 정도로 사쿠라이는 자신도 모르는 새에 오노의 향에 푹 빠져있었다. 알파의 본능이란 다 지워져 가는 오메가의 페로몬 냄새에도 집착하는 것이었다. 대충 구실을 만들어서 사장실에 다시 올라가 볼 요량으로 사무실의 문을 힘있게 열어젖혔다.
오노의 머릿속도 비슷한 상황이었다. 어떻게든 다시 사쿠라이를 불러보고 싶었다. 페로몬을 지우지 않은 상태에서 그를 부르는 것은 그 이상 무모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과감한 결정이었다. 하지만 분명히 오노는 사쿠라이에게 끌리고 있었고, 오노 본인도 그걸 자각하고 있었기에, 그에게 잡힌다 해도 후회는 없었다. 오히려 마음 한쪽에서는 그에게 목덜미를 물리길 바라고 있는지도 몰랐다. 여기저기 쌓인 결재서류들을 멍한 눈으로 읽는 그의 머릿속은 퇴근시간에 가까워질수록 사쿠라이로 가득 찼다.
“그, 이번에 새로 들어온 신입, 어 사쿠라이였나? 좀 남아보라고 해봐. 일 끝나면 사장실로 오라고 하고.”
오노가 비서에게 전달을 맡겼다. 그의 심장이 조금씩 빠른 박동을 더해갔다.
그 연락을 받은 사쿠라이는 의아해할 수밖에 없었다. ‘칼 같은 퇴근을 지시하는 사람이 굳이 나에게만 야근을?’하는 생각을 피할 수 없었지만 사장의 지시이니 거를 수도 없었고 오히려 다시 사장실에 들어가 볼 수 있는 좋은 기회라는 생각도 들었다.
며칠 전과 같이 사장실 앞에 도착하자 준비하고 있던 비서가 사쿠라이를 안내했다. 하지만 이상하게 문은 직접 열어달라는 것이었다. 저번에는 분명 문을 열어주고 함께 방에 들어가기까지 했는데 이번에는 비서는 가만히 서있을 뿐 문을 열어주거나 하는 움직임은 없었다. 사쿠라이는 필시 이것도 사장의 지시가 있었겠구나, 하고 생각하며 문을 조심스레 밀었다. 아주 작은 틈이 생긴 것뿐인데 그 사이로 예의 달큰한 냄새가 확 뿜어져 나와 사쿠라이의 얼굴을 덮쳤다. 그러자 단번에 알 수 있었다. 그때 맡은 냄새는 다 사라져가는 오메가의 페로몬 냄새였음을. 우성 알파인 그의 뒷덜미가 쭈뼛하게 당겨지며 마음이 벅차오르고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하지만 그가 서있는 곳은 사장실 앞, 사쿠라이는 최대한 그것을 들키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숨을 고르고 들어갔다.
“연락받고 왔습니다. 무슨 일로 부르셨는,”
온몸에 열기가 감돌면서 더 거칠어진 숨과 당장이라도 눈앞의 오노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싶은 본능이 그의 말을 잘라먹었다. 읏, 하는 아주 작은 신음과 함께 사쿠라이가 손톱자국이 나도록 세게 주먹을 쥐었다. 최대한 참는 중이었다.
“조금 더 가까이 와보지.”
오노의 목소리도 떨리고 있었다. 삼킨 숨이 속에서 요동쳐 목구멍은 간질간질하고, 다리는 약간의 공포에 젖어 한시도 가만히 있지를 못했다.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사쿠라이를 가깝게 부른 것은 그에게 도박과도 같았다. 그의 냄새를 다시 한 번 맡고 자신의 운명임을 확인하고 싶어 저지른 과감한 행동이었지만, 감이 틀릴 경우 운명의 상대도 아닌 사람에게 놀아나기만 하고 회사 전체에 사장이 오메가라는 소문이 퍼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의 눈꺼풀은 총명한 천리안을 덮었고 먼 앞날은 더 이상 그에게 보이지 않았다.
책상을 하나 두고 마주보고 있는 서로의 얼굴이 점점 가까워졌다. 사쿠라이의 얼굴이 다가갈수록 둘의 숨은 더 가빠지고 얼굴은 더 달아올랐다. 거의 한 뼘만을 남겨두고 오노와 사쿠라이의 눈이 마주했을 때, 서로는 바로 알 수 있었다. 자신이 상대의 운명이라는 것을. 그걸 느끼자마자 사쿠라이는 넥타이부터 과감하게 풀었다.
“그래서, 절 부르셨군요.”
사쿠라이가 터져나오는 숨을 마구 삼키며 말했다. 오노는 이미 그의 질문에 대답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기에 답은 돌아오지 않았지만 그런 그의 상태를 보고 사쿠라이는 다시 확신할 수 있었다. 오늘 그의 목덜미에 자신의 잇자국을 남기는 것이 그의 업무였다.
알파 앞에서 오노는 차오르는 체온과 호흡을 제어하지 못하는 나약한 개체에 불과했지만, 고집이 많은 그는 손에 쥔 억제제를 입으로 가져가지 않았다. 운명의 상대라는 것을 확신한 순간 이미 억제제를 먹으려는 생각은 떠나고 없었다. 그저 반쯤 풀린 눈으로 사쿠라이를 쳐다보면서 그가 자신이 앉아있는 푹신한 의자에 기어 올라오기를 기다릴 뿐이었다. 모든 행동들은 본능이었고 관성이었다. 사쿠라이는 꿀 냄새에 이끌린 벌처럼 천천히 오노의 의자에 한 쪽 무릎을 올리고 팔걸이 하나를 손으로 짚었다. 그러더니 완전히 오노에게 기댄 사쿠라이가 그의 얼굴은 양손으로 감싸고 천천히 키스를 하려 하자, 오노는 억제제를 쥐고 있던 손을 펴 그대로 바닥에 캡슐을 떨어트려버렸다. 여기서 멈출 생각이 전혀 없었다.
폭발하는 오노의 페로몬 냄새에 그의 얼굴을 잡고 있던 사쿠라이의 손에 힘이 실렸다. 부드러움은 온데간데없고 안달이 났다는 표정을 한 그가 오노의 얼굴을 당겨 바로 입술을 가져다댔다. 과격하게 움직이는 입술은 금세 오노의 입술도 열었고 그 속으로 혀를 푹 찔러넣었다. 살짝 벌어진 틈으로 숨을 몰아쉬면서도 그는 입술을 떼지 않았다. 숨이 차올라 얼굴이 벌게지는 가운데에서도 오노의 입안을 향한 유린은 끝날 줄을 모르고 계속되었다. 정제되지 않은 신음이 맞부딪히는 입술 사이로 배어나왔다.
한껏 괴롭혀진 오노의 몸이 열기로 가득 찼을 때, 얼굴을 뗀 사쿠라이가 오노의 목덜미를 콱 물었다. 이가 떨어진 자리에는 둥그런 자국이 남아 피를 스멀스멀 뱉어냈다.
“업무 완료했습니다, 오노씨.”
